명절 아침으로 누른밥에 김치찌개를 먹었다. 어제남은 저녁밥 누룽지로 끓인 누른밥은 술술 잘도 넘어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편은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끓여 내었다. 떡만둣국을 먹지 않은 설날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분주하지 않은 설날아침이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태어나 처음, 진심으로 해방감이 들었다. 남편은 연휴 전날 자신의 아버지를 뵙고 와서 그런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그와는 천양지차다. 진정 내게도 자유로운 명절이 온 것일까?
평소 같으면 명절연휴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고 갔을 것이다. 시댁을 먼저 가느냐 친정엘 먼저 가느냐가 단연 우선시 되는 화두였다. 용돈은 얼마를 드려야 하나, 조카들 세뱃돈봉투는 어떻게 할 거냐, 빳빳한 새 돈을 뽑아오는 일은 누가 맡을 거냐, 같은 작은 부산함 들도 있었다. 악성 감초인 가벼운 통장의 잔고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양가의 어머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들의 부재로 명절의 많은 것들이 축소되고 사라졌다. 쌀을 씻어 밤새 불려 방앗간까지 이고 지고 갈 일도, 기계에서 연신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을 보며 침을 삼킬 일도 없다. 발에 쥐가 날 정도로 앉아 전을 부치지 않아도 되고 온몸에 기름기를 뒤집어쓴 여자가 될 필요도 없다. 어머니들이 명절일도 함께 안고 가신 거다.
명절아침에 떡만둣국을 먹지 않아 속이 시원한 이유는 또 있다. 명절음식으로 제일 만들기 힘든 음식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만두가 명절 아침 주식으로 오르기까지는 고난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새콤하게 익은 김장김치를 빨고 다져 갖은양념과 부속물들을 넣고 치대야 한다. 마치 김장과 비슷한 노동에너지가 든다. 이건 과정 중 절반이 지난 것, 또 다른 과정은 만두피를 만드는 일이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쫄깃한 식감을 내기 위해서는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다시 소분하여 밀대로 동그랗게 만두피를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다. 어른들은 오랜만에 여자들끼리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을 가문의 영광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양가를 다녀야 하는 자식들, 특히 여자들에겐 고된 날일 수밖에 없다.
만두는 만인이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이런 고된 과정이 있다는 것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명절날이 되면 남자들은 허허대고 점잖은 척 앉아 먹기만 하면 되었지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여자들은 안팎으로 재게 움직여야만 했다. 남편은 수고로운 명절이 끝나갈 즈음에서야 "수고했어!"라는 무심한 한 마디를 건네며 나의 수고를 퉁쳤다. 온몸이 쑤시고 몸살이 나는 것은 집에 돌아와서다. 하루이틀 쉰 후 다시 출근을 했다.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니 결혼 후부터 시작된 8대 명절(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 생신, 양력 1월 1일, 설날, 어버이날, 추석)의 실랑이로 인생을 다 보낸 듯하다. 꼭 8대 명절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땅덩이가 큰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고(너무 멀리 떨어진 관계로 갈 수 없는 것,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는 것, 등등) 한때는 이민의 로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두 가지 모두 실행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평생 조산사로 일을 했고 지금껏 쉬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8대 명절을 철저히 지키는 축에 들지 못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명절마다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 일도 있었고 조산원을 연 후에는 명절에 태어나는 아기를 받는 일도 있었다. 특히 보름달이 뜨는 추석에는 거의 아기들이 태어났다.(보름달이 뜨는 날엔 평소보다 많은 아기들이 태어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인 며느리, 딸로 지냈다.
어느 해인가엔 어버이날에 제주도로 아기를 받으러 간 일도 기억이 난다. 제주의 봄꽃을 보며 폐부 깊숙이 들이켰던 신선한 꽃내음에 감탄하는 순간도 있었다. 어버이날에도 일을 해야 했던 나는 그나마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언던 건지도 모른다.
명절 삼 일 전, 몸에 배어버린 명절 만두 만들기 버릇은 이번에도 결국 발휘되긴 했다. 예전과 다른 점은 딱 한 끼 양만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치 한 포기를 물에 씻어 물기를 짠 후 다지고, 더하여 두부 반모, 숙주나물 조금, 간 돼지고기, 들기름 듬뿍 넣어 치댄 만두소를 만들었다. 우리 식구 한 끼 식사로 서른 개만 만들기로 했다. 밀가루 반죽이 완성되고 차지게 변한 밀가루 덩이를 잘라 동그랗게 밀대로 밀었다. 네 식구가 도란도란 소박한 개수의 만두를 빚었다. 의무감에 산더미처럼 많은 만두를 만들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다.
명절은 좋은 날이다. 한동안 못 보던 가족을 만나 특별한 음식을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는 날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는 겉치레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특별한 날이 되면 어떨까 한다. 공평히 준비하고 즐기는 명절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