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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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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Jul 31. 2024

발가락부터 나오는 아기(둔위. Breech birth)

산파일기

이른 아침, 아기가 거꾸로  나오고 있다고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2주 전만 해도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어서 순조로운 출산을 기대했었다고 했다. 진통이 시작되어 내원한 산모를 진찰하니 양수는 터졌고 자궁문이 거의 다 열린 상태인데 단단한 머리가 아닌 몽글몽글한 살들이 만져진다며 둔위로 돌아간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기와 산모의 안위도 걱정되었지만 그 걱정의 무게와 똑같은 무게로 후배가 겪을 고생도 걱정되었다.

순간의 선택이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출산, 게다가 거꾸로 태어나는 아기를 받아야 하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아기를 받으면서 휘몰아치는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건 누군가와의  대화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도 어려운 출산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나면 문제가 좀 풀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현장에서 직접 아기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나 그런 상황을 만난다. 아기가 내려오는 과정이 오래 걸리는 이유도 안다.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의구심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고민이 극에 달할 때 선배나 동료에게 지금의 산모 상태를 설명하다 보면 내가 처한 지금, 즉,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시 힘을 얻어 산모 곁으로 갈 수 있다.


나는 후배의 설명을 들었고, 함께 걱정을 나누고 작은 위로와 용기의 말을 건넸다. 병원이 아닌 조산원에서의 출산은 아기를 낳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두 명 모두 배짱의 크기가 균형을 이뤄야지만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다행히도 두 사람 간의 배짱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 보였다.


산부인과에서 일할 때 진행이 잘 되지 않는 산모를 만난 의사들은 소독장갑을 벗어던지고 좁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담배를 피워물며 그들도 역시 선배나 동료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산모옆에서 끝이 없을 것 같은 힘주기를 시켜야만 했다. 20여분 정도가 지나면 의사는 몸과 마음을 추스른 몸짓을 하고 분만실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 20분의 효과는 해 본 사람만이 안다. 단 한 사람만 산모 곁에 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출산 호르몬이 최대치로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환경이 아기를 내보낼 수 있는 본능적인 힘을 극대화시킨다. 그래서 자리를 비운 의사가 담배를 피우는 시간은 출산을 앞당기게 한다.

많은 아기들을 받아낸 노련한 의사나 조산사는 기다림이 주는 자연의 힘을 알고 있다. 불안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대한민국은 거꾸로(엉덩이나 발이 먼저 나오는) 아기를 자연출산으로 받는 병원은 거의 없다. 양수가 터진 둔위라! 저 상태로 산부인과로 간다면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며 응급 제왕절개수술을 하게 된다. 제왕절개 수술은 아기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현대의 기술이다라고 칭송받고 있다. 그럼 아니냐고 되물어도 사실 할 말은 없다.


병원과 조산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조산사의 의견보다 아기 낳는 이의 의견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 산모는 양수가 터졌고, 아기의 엉덩이와 발가락이 만져지며, 처음 바깥으로 나올 선진부가 엉덩이니 태변을 싸는 것은 당연하다. 비정상이라고 할라치면 모두 다 비정상이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조산사는 이런 상황도 출산의 과정이라 여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산모가 자연스럽게 아기 낳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산모와 가족들은 불안해하지도 않고, 조산사를 신뢰하며, 무엇보다 뱃속 아기를 믿는다는 것이다. 더 무엇이 필요할까?


조산사의 가장 큰 배짱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할 일은 아기가 출산의 과정을 잘 견디며 건강히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P/S: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아기는 세상으로 와서 숨을 쉬었고, 천천히 엄마젖을 찾아 빨았다.

애썼을 산모와 아기, 자랑스러운 후배에게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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