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고 부르는, 인터라켄.

살아가기. 조산사의 삶

by 김옥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 본다.

높지 않은 흰색톤이 대부분인 깔끔한 호텔은 기차역에서 아주 가깝다. 얼른 밖을 구경하고 싶어 짐만 호텔에 넣어 두고는 밖으로 나왔다. 보이는 곳마다 엽서다. 어디를 찍어도 그림이다. 멀리 보이는 설산의 기운 때문인지 서두름 없이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는 압도적이다. 전화 벨소리도,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 소리도 없다.

기차역 광장에 오렌지색이 일렁인다. 사람인지 그냥 오렌지 덩어리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청년들이 바글바글하다. 2008년( Union of Euopean Football Association UEFA ) 유럽축구리그 예선에 오른 네덜란드 선수들을 응원하러 가는 그 나라 청년들이다. 네덜란드의 왕가와 국가를 상징하는 오렌지색, 그 나라 축구 응원단 '오렌지 군단'을 만난 거다. 전통 네덜란드 복장을 한 응원단 여학생들은 또 얼마나 이쁘던지!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소리쳐 응원을 하고 윗옷을 벗어 흔들어대며 춤을 춘다. 축구장은 떨어져 있지만 여기도 그들에겐 축구장 못지않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축제다. 나도 함께 오렌지색 보자기라도 써야 할 듯했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36번의 방사선 치료를 서둘러 마치고 떠나온 여행길이다. 삶을 정리하게 하는 병은 지금껏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호기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둘이서 자유여행 중이다. 안되면 되는 것으로 바꾸고, 힘들면 쉬어가고, 더 힘들면 주저앉아 울면 된다. 부끄럽고 자존심 상할 일이 뭐 그리 대수인가. 내 생명이 이 만큼이면, 그만 내려놓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묵언의 약속을 했었다. 유럽의 시차 적응도 안되고 차편도 복잡해서 힘들고 기운이 빠졌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들이 주는 열정의 기운은 발걸음마저 가볍게 했다. 사람 구경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다니... 어우러져 함성을 지르는 젊은이들을 만나니 오랜만에 행복하다.

역 근처 공공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기로 계획했었다. 바쁠 것 없으니 아주 천천히 걷는다. 광장 오른쪽으로 300미터쯤 에 위치해 있는데 중간에 작은 꽃가게가 나를 붙잡았다. 이른 시간이라서 문은 아직 닫혀 있지만 밖에 놓여있는 꽃들이 아기자기 이국적이다. 한참을 꽃가게 앞을 서성였다. 자전거 대여점 건물은 겉으로 보기엔 작아 보였는데 그 안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코 큰 백인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우리를 맞는다. 나이와 성별, 신체 크기에 따라 적당한 자전거를 골라준단다. 내 것으로 어린이용을 달라고 했더니 안된다며 손사래를 친다. 내 몸에 맞는 자전거를 고르느라 그가 애쓴다. 코 큰 남자가 골라준 자전거는 맘에 꼭 들었다. 내 팔다리에 꼭 맞는 자전거를 타니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하다. 집에 돌아가서도 이 자전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도의 호젓한 귤 밭길을, 시골의 한적한 흙길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스위스 설산을 보며 자전거를 타다니! 아무도 없는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근처 슈퍼에 들러 요구르트와 치즈, 사과 두 개를 샀다. 여행을 다니며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시장 구경이다. 이들은 뭘 먹고살까? 둘러보니 별거 없다. 네덜란드의 주홍 괴물들은 벌써 기차를 타고 갔는지 널따란 광장이 나른할 정도로 휑하다. 자전거 손잡이 앞에 달린 바구니에 간식을 넣고 슬슬 페달을 밟는다 sound of music 주인공인 쥬리 엔드류스가 본트랩 대령의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도레미 song은 아니지만 저절로 페달 박자에 맞춰서 흥얼거렸다. 대부분이 평지라 애쓸 일은 없지만 그동안 불어난 체중을 싣고 가려니 느껴지는 무게감이 지금까지의 내 삶인 듯하다.

예쁜 색들로 치장된 가게엔 기념품들과 갖가지 쿠쿠 시계가 벽에 가득하다. 인형이 나왔다 들어가기도 하고 크고 작은 뻐꾸기들이 들락날락 바쁘다. 또다시 한참을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길가엔 인부들이 줄지어 꽃을 심느라 잰걸음으로 오간다. 어릴 적 우리 집 꽃밭에 심었던 족두리 꽃도 있고 샐비어 꽃도 있다. 내가 아는 꽃은 그것뿐이지만 다른 어떠한 꽃도 이쁘다. 유월의 스위스는 이제 막 봄인가 보다. 도로에 즐비했던 상가가 끝나자 좁은 길이 나오면서 한적해졌다. 까마득히 높은 눈 덮인 산과, 산 아랫자락 오크색 집들 창가엔 갖가지 꽃들이 걸려있다. 하늘나라도 이럴까? 공기는 맑다 못해 달다. 전생에 스위스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 곳서 살았던 것 같다는 엉터리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래 난 스위스 설산 아래서 살았던 목동이었어!

한껏 페달을 밟자 하늘색 호수가 나타났다. 물 색을 본 순간 가슴을 철렁 내려앉다 못해 뒷걸음이 쳐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름이 돋고 무서웠다. 꿈속에서 본 하늘색 물빛! 아무것도 없는 넓고 깊은 잔잔한 옥빛 투명한 물 위에 흰색의 넓은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넜었다.

호숫가로 조심조심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다가갔다. 그래도 선뜻 물을 만지기가 두렵다. 녹아내린 빙하가 잠시 쉬어가는 곳, 옥빛 물은 호수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좁은 내를 소리 내며 흘러간다.

자전거 두 대가 아무도 없는 아스팔트 위에 서 있다. 우리도 그렇게 쉬었다. 200미터 앞에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아이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엄마도 보인다. 아이의 낚시를 즐거운 맘으로 따라왔을까? 떼를 부려 마지못해 따라왔을까? 포말 한 베이지톤 니트가 낚시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나도 그이들도 한 폭의 그림이다.

설산을 오르거나 아슬아슬한 곤돌라 따위 경험은 필요 없다. 그냥 이렇게 가다 서다 구경하는 것이다. 산등성이 아랫녘은 들꽃들이 한창이어서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한다. 앙증맞은 기념품 가게에서 알프스 대표 기념품인 종을 사고 또 천천히 길을 걸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것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화장기 없는 웃는 모습 같은 오래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맥주와 커피를 주문했다. 시골마을 앞마당에 생각 없이 앉은 이방인은 이곳이 좋다. 먼지 없는 곳에서 자라서 더 진한, 핑크빛의 코스모스 한 무더기와 주홍 나리꽃 주위로 호랑나비 두 마리가 놀고 있다. 아! 얼마 만에 느끼는 한가함인가! 아주 먼 곳서 물소리가 들린다. 설산의 녹은 눈이 굉음을 내며 내려오는 유명한 동굴은 가 보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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