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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랑땡

일상

by 김옥진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편안한 시절이 도래했다. 달력의 빨강 글자는 바빴던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다. 이제는 근무 표를 보며 투덜거리지 않아도 되고,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아기 낳을 산모의 출산 예정일에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전화벨 소리에 자동으로 각성되던 순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벨 소리에 바로 잠이 깨곤 한다. 그리고 버릇처럼 전화기는 내 머리맡에 있다. 전화기가 없으면 자꾸만 깬다. 숙면을 방해하던 전화기는 반대로 숙면을 위한 도구가 된 셈이다. 앞으로 전화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간은 올 것이고 아마도 이 시절이 그리워지겠지.

길어진 명절 연휴 동안 냉장고를 비우기로 한다. 냉장고를 비우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니 스트레스받을 것도 없다. 냉장고에 넣어둔 재료 일부는 날짜가 쓰여있는 것도 있지만 반 이상은 언제 넣어 두었는지 알 길이 없다. 정신줄을 놓고 산 시절을 이번 연휴를 빌어 하나씩 지우기로 하고 하루에 한 가지씩 명절 음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여름에 만들어 놓은 호박만두소를 꺼내서 명절 음식의 하이라이트인 동그랑땡을 만든다. 사실 만두를 만들 때 제일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소를 만드는 일이다. 동생 주려고 만들었는데 전달하지 못한 채 냉동고에 있었다.

호박이 많이 들어간 소는 동그랗게 만들기가 어렵다. 이럴 때는 파프리카를 썰어 밀가루를 묻힌 후 소를 넣는 것이 편하다. 야채를 먹을 수도 있으니 영양만점이다. 전을 부치는 일은 명절일 중 제일 고된 일이지만 우리 가족 네 사람만 먹을 양이니 그럭저럭 할만하다. 대가족의 먹을거리를 허리가 휘도록 만들었던 우리네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무엇이든지 내게 가르쳐 주셨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 때 그랬다. 칼은 요렇게 잡고 썰어야 되고, 불을 조절하는 것, 익는 과정, 담아내는 요령까지. 마지막으로 간을 볼 때는 그 누구보다 엄마랑 특별한 비밀을 갖는 동지가 된 기분이었다. "어때? 맛있지? 간이 맞는 것 같니?" 오물오물 먹는 내 입을 보며 어머니는 물었다. 연이어 한입 베어 물을 어머니의 얼굴도 이미 맛있다고 쓰여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머니처럼 아이들에게 음식을 가르치곤 하지만 이번엔 나 혼자 하기로 한다. 머릿속에 그려진 내 방식대로 하나하나 착착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쉬워서다.


파프리카를 씻어서 물기를 뺀 후 썰어 밀가루를 묻힌다. 비닐에 밀가루를 넣고 한바탕 춤을 추면 끝.

계란 다섯 개를 풀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소금 한 꼬집은 내가 넣어야 간 조절이 맞다. 부르면 쪼르륵 달려와 시키는 것을 하는 남편은 불러준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그 사이 파프리카에 소를 넣어 다시 양쪽에 밀가루를 묻힌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칠 준비를 한다.

더 도와줄 거 없냐고 묻는 남편에게 이제는 할 것 없으니 저만큼 가 있으라고 했다. 알아서 척척하는 여자 유전자가 없는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엔 입이 고생을 해서다. 눈과 손, 머리가 팽팽 돌아야 음식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이 따로 노는 남자에게는 딱 한 가지씩만 시켜야 한다. 전을 부치는 복잡한 일은 그래서 여자들이 할 수밖에 없다.

일곱 개의 동그랑땡이 프라이팬에 지지직 소리를 내며 올려진다. 기름을 너무 많이 넣으면 느끼하니 기름양을 조절한다. 계란 물이 싱크대에 떨어지지 않도록 두 손은 재빨라야 하고 불 조절을 잘못하면 속은 익지 않은 채 탈 수 있으니 수시로 강약을 조절한다. 매번 전을 부친 프라이팬은 다음 전을 부치기 위해 기름을 종이로 닦아야 한다. 부친 프라이팬에 새 전을 부치면 지저분해져서다. 한 쪽에는 익은 전을 올려놓을 채반을 준비한다. 준비된 재료가 소진될 때까지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집안이 전 냄새로 가득하다. 눈 비비며 나온 딸들의 코가 벌름거린다."야 맛있는 냄새가 난다. 뭐야 엄마?" 식은 동그랑땡을 한 개씩 입에 넣어 주며 물어본다. "간이 맞니? 맛있지?"


내일은 햇 깍두기와 물김치를 담그기로 한다.


창밖엔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베란다 창 틀에 수북이 쌓인 눈이 명절 분위기를 돋우지만 오고 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겐 곤욕일 터, 그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길 기도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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