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파 일기
요즘 들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모든 일들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을 하던, 어떠한 사람을 만나던 아무런 토를 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일은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마무리된다. 하고 싶은 마음의 유무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지는데 기꺼운 마음이 든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게다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즐겁기 때문에 일의 무게 따위도 계산하지 않는다. 돌아보니 삶의 대부분은 타인을 위해 살았더랬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했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면 가족을 위한다는 핑계를 찾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강요에 의한 일에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인생은 고달팠다. 원하는 데로 하고 싶어서 개인일을 시작했다. 내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하지만 힘든 만큼 기뻤다. 내가 선택한 후자의 일은 어느 일보다 인간적인 일이어서 다. 하고 싶은 일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의 그 어느 기쁨보다 진하다. 더하여 인간적인 만족은 일이 주는 무게를 견디게 하는 원동력으로 변한다.
직업과는 상관없이 나는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하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힘이 든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더하여 음식을 차려내고 받는 대가 따위는 이제 순위에서 한참 뒤로 물러나 있다.
오랜만에 미국 조지아에서 사촌여동생이 왔다.
내가 중학생 때 유치원에 다녔던 사촌은 오십 줄의 중년의 모습으로 공항에 등장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을 해외서 보냈음에도 몸에 밴 토종의 모습은 여전하다. 함께 외식을 했으나 마음 한편에 자꾸 허전함이 몰려왔다. 좋은 곳을 고른답시고 간 식당은 하필이면 스파게티 맛집이었다. 미국서 살다 온 사촌과 스파게티를 먹다니. 마음 한편에 집밥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싹텄다. 급기야 마음 끌리는 데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사십 년 전 넉넉지 않던 시절에 함께 먹던 음식을 메뉴로 정했다.
가족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음식을 만들기로 한다. 음식준비가 힘들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음식을 할 생각으로 마음이 구름처럼 떠오른다.
차를 몰고 시장을 보러 가는 일, 주차공간이 충분치 않아 잠시 마음이 와글거리는 일, 매장에 놓여있는 물건들의 유통과정을 살피고 제일 신선한 재료를 고르는 손길, 물건들이 주는 중력에 손바닥에 자국이 남을지언정 발걸음은 가볍다. 이 모든 과정이 음식 안에 스미니 더욱 맛있지 않을까. 다음 단계로 장을 본 재료들을 씻고, 자르고, 무치고, 익힌다. 요즘은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 일이 없어졌다. 여자들의 지위가 높아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왜 누군가에게 밥을 해 주고 싶은 것일까. 내가 하고 싶어서다.
오랜만에 남편에게 선물했던 부엌을 점령했다. 두 어 시간 동안 서있으니 발바닥이 찌릿거리고 허리에 돌덩이를 달아놓은 느낌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마음은 춤을 춘다.
간호학을 전공하며 특별히 뇌리에 박힌 어구가 있다. "빠르고 정확하게"다. 모든 의료인의 덕목일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삶의 모토로 작용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할까 하고 미리 상황을 상상한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확인하고 추가할 것들을 메모한다. 조리가 시작되면 머릿속에 남겨 둔 순서를 꺼낸다. 누군가가 도와준답시고 곁에 있으면 일이 꼬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은 혼자서 한다. 그 이유로 감당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나를 알게 되면서 점점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는 심보를 고치기로 마음먹고 있다. 나누니 덜 힘들고 그로 인한 짜증 횟수도 준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표정도 밝아진다.
그러나 이번 음식 준비만큼은 '빠르고 정확하게' 하기로 한다. 하루쯤 예전의 나를 꺼내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한국사람의 초대음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반찬의 기본인 김치에 신선함을 더하려 겉절이를 한다. 알배기 배추를 썰어 절이고 씻어 멸치액젓과 갖은양념을 넣고 무쳤다. 고기가 없으면 무게감이 떨어지니 소불고기 전골을 올리기로 한다. 태양빛 아래서 자란 부추와 애호박을 썰고, 청양고추 두 개를 쫑쫑 썰어 넣어 칼칼한 부침개도 완성했다. 화려한 잡채는 화룡점정! 작년에 거두어 손질해 두었던 들깨꽃 부각이 냉장고를 탈출해 노릇노릇하게 기름에 튀겨졌다. 어머니는 초가을쯤 들판의 들깨 꽃대를 꺾었다. 깨끗이 씻어 오전 반나절 동안 물기를 뺀 후 찹쌀 가루를 입혀 다시 반나절 동안 그늘에 말렸다. 어머니의 하루가 들어 있는 줄 알 길 없는 나는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더랬다. 두부도 지져서 양념장을 얹었다. 올해 수확한 수미감자를 삶고 으깨서 샐러드도 한다. 오이 5개와 양파 반 개를 채 썰어 절인다. 삼십 분쯤 절인 후 물에 한번 헹궈 꼭 짠다. 거기에 삶은 계란을 잘게 부수어 넣고 준비된 으깬 감자를 섞는다. 감자 샐러드가 완성된다.
음식들이 하나둘 차려졌고 시간 맞춰 사촌가족이 도착했다. 미국서 나고 자란 사촌 딸은 한창 한국말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은 한국 음식이름 알기다. 차린 음식이 입맛에 맞을까 걱정스러웠으나 생전 처음 먹어보는 몇 가지 음식을 신기해했다. 생경한 음식과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걸 보면 깊은 속의 DNA엔 한국인이 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준비는 다섯 시간인데 먹는 것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내 마음이 흡족하다. 집밥을 대접하는 일은 쉽진 않았지만 음식에 담긴 내 마음을 읽어주기를, 작은 사랑을 기억했으면 한다. 며칠 후면 다시 먼 나라, 제 집으로 간다. 내어주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눈치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주고받은 몸짓과 눈빛으로 사랑을 느낀다. 세월이 흘러 또다시 만나면 집밥을 해 주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