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파일기
心(심): 마음 심, 심장(heart)
臟(장): 오장육부 장, 내장(organ)
아기를 받으며 놀랐던 흔적을 심장은 기억한다. 근래에는 쉬겠다며 투정도 부린다. 포장이 되지 않은 고산지대를 오가는 트럭처럼 심장도 알게 모르게 이곳저곳이 삭아졌을 것이다. 사실 살면서 재 정비에 소홀했음도 인정한다. 인생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늘도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는 사실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어린아이 달래듯 조심조심 보듬어 살 수밖에 없다. 태어나서부터 한시도 쉬지 않았던 심장을 손보는 일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일일 것이다.
가끔 느껴지는 부정맥 때문에 심장 검사를 하기로 한다. 심장이 있는 곳에 끈끈이 기계를 달고서 삼 일간 행적을 기록한단다. 가슴팍 두 군데에 기계장치를 달았다. 측정에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심한 운동이나 샤워도 하지 말란다. 대단한 검사인 듯 장황히 설명을 하지만 검사를 하는 도중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이 더운 날에 샤워 금지는 기가 막힐 일이지만 고가의 기계가 물로 인해 고장이 나는 것을 방지하는 이유라니 어쩔 수가 없다. 물만 조심하라는 말에 걱정을 덜었다.
이십 년 전,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정신없이 살다가 병 때문에 휴가를 얻은 기분이라서 얼마나 좋던지. 그동안 재발하지 않고 살았으니 감사를 해야 할 터이다. 덤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한다.
검사 결과는 심장의 상태를 관찰 한 기계회사에서 알려준다고 한다. 간호사가 개인정보 공유를 해야 한다며 승낙서를 들이민다. 심장의 정보를 가져야 진단을 할 수 있고 결과를 근거로 치료를 할 수 있다나. 아픈 주제에 어처구니없게도 왜 너희들이 내 심장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느냐고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어린애처럼 버둥버둥 뒹굴며 떼라도 부려보고 싶었다. 이성을 붙잡고 바라보니 그럴 상황은 아니다. 서명을 하며 빅브라더 손아귀에 덜미를 잡혀버린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숨어있던 오욕 칠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술대 위에서 어쩔 수 없이 똥 찬 내장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환자처럼 내가 결정할 것들은 없다. 병원이라는 곳은 루저임을 받아들이고 가는 곳이다.
수많은 서명을 요구당하는 시대에서 개성을 내어놓는 일은 바보짓일까. VIP가 아니라서, 민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홀로 꿋꿋이 지켜왔던 그 컸던 자존감은 어디로 갔을까. 모든 것들을 '그러려니'하고 넘겨야 할 시간이 온 것일까?
아기를 받는 일이 내 살 파먹는 일인 줄을 심장이 덜커덩거리고 나니 안다. 아기 받는 일을 두고 다들 복 짓는 일이라며 추켜 세우는 말에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일들이 일일이 심장에 새겨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맞서지 않고 물 흐르듯 내버려 두었을 것을. 어처구니없게도 어떤 것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기를 부리기도 했다.
심장이 벌떡거리며 데모를 한다. 자업자득이지. 속수무책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다. 심장을 쥐락펴락한 수천 개의 탄생의 순간들은 여전히 영화의 필름처럼 생생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버둥대던 모습은 바로 널뛰는 내 심장과 닮아 있다. 인생은 그런 것, 버둥대며 지나는 것. 깨닫는 순간은 짧기만 하고 그 이후는 더 짧은 것. 첫 숨 쉬는 아기를 보고 안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심장에게 휴식을 선물하려 한다.
천천히 걷고, 따듯한 눈빛을 건네기로 한다. 짙어지는 초여름의 잎사귀에 감탄하고 시원한 빗줄기에 몸을 적셔보는 것도 좋겠다. 오늘은 소서, 헉헉대는 날씨는 온갖 작물들을 키워낸다. 10센티의 어린 오이가 아침에 보니 15센티로 자라 있다. 내버려 두어도 절로 자라는 기특한 녀석이다. 보름 후면 영글 초록 머루가 파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이 달렸다. 만석지기가 부럽지 않다. 까맣게 익은 오디도 따 먹어야지. 까맣게 변한 영구 이빨을 보고 깔깔댈 우리들, 상상만으로도 통쾌하다. 오늘 점심엔 금방 딴 애호박과 공심채로 건강한 밥상을 차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