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파일기
9월 초순, 얄궂은 곳에 콩알같이 단단한 것이 만져진다. 조직 검사를 하니 암이란다. 진단이 내려지자 조급해진다. 부산을 떨며 수술 가능한 장소를 찾았다.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수술할 병원이 정해졌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한시름이 놓였다. 일사천리로 MRI CT Bone scan 초음파를 한다. 10월 30일로 수술 날짜도 정해졌다. 그러나 수술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정일이 찬 아기를 받는 일이다. 제때에 태어나지 않으면 어쩔까 하는 조바심도 나지만 그런 맘이 들어도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기가 우리의 바람을 알아챘을까. 햇살이 정중앙 머리 위를 지나갈 무렵 기적처럼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 아빠, 학교서 이제 막 돌아온 딸, 아직은 천방지축인 24개월 막내가 함께했다. 물에서 헤엄치며 태어난 녀석은 아들이다. 모두들 녀석을 보고 박수를 친다. 나도 녀석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해야 힐 일은 제주로 자연출산 특강을 가는 것이다. 오래전에 강의가 예약되어 있다. 아슬아슬하게 입원 전날에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찌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겠냐마는 신기하게도 착착 계획이 들어맞고 있는 요 며칠은 기적처럼 느껴진다.
제주 강의를 마치고 남은 이틀간 어슬렁거리며 여행도 했다. 수술 날짜를 정한 후 하는 여행이라서 제주라는 곳이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모든 것을 잊고 즐기기로 한다. 8년 만에 온 제주를 이토록 느긋하게 즐기기는 처음이다. 천천히 땅을 밟으며 곳곳에 서린 선인들의 기운을 느낀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살았던 지혜가 내게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간 머문 제주에 매료되어 조만간 꼭 다시 오리라 약속을 한다. 비행기가 검은 밤바다를 날아오른다. 집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편안하다. 아무리 산해진미에 더없이 좋은 풍경도 집보다는 못하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 물품을 정리한다. 또다시 가방에는 병원 입원 물품으로 채워진다. 단 하루 만에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던 제주 하늘과 비췻빛 바다 대신 온통 하얀 벽과 천장이 대신하겠지만. 바꿀 수 없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입원을 한다. 병실은 11층, 번호는 212호, 5인실이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보태졌다. 아무에게나 기도를 해 달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씩씩한척해 봤자 득이 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 불안은 기도의 크기로 작아진다.
입원 다음날 오전 8시에 일등으로 수술실에 들어간다. 병동 간호사가 수술실로 내려가기 전 소리 내어 기도를 해 주었다. 아리따운 나이의 간호사가 돌보는 손길이 따듯하다..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엔 20번이라는 표식이 달려있다. 기우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 다른 방으로 들어가게 될까 염려가 된다. 수술 대기실 번호가 2번이다.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귀가 솔깃하다. 수술 전 대기하고 있는 환자에게 일일이 기도를 해주시는 분인 듯하다. 내게도 오시려나. 잠시 후 미소를 머금고 내 자리로 다가온 수녀님께서 폭신한 목소리의 기도를 선물해 주셨다. 천사가 따로 없다. 따듯하고 보드라운 목소리와 확신에 찬듯한 악수는 수술이 순조로울 거란 확신을 주었다.
우리는 곳곳의 천사를 만나며 산다. 천사라는 이름표는 없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천천임에 틀림없다. 많은 천사들이 내게 손을 내밀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걸 수술을 앞두고 알게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천사이고 싶다.
수술 방은 두 번 방향을 틀고서야 도착했다. 미로 같은 수술방들 안엔 여러 의료진들의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환자 곁에서 준비를 도왔던 내가 거꾸로 입장이 바뀌었다. 오래살고 볼 일이다. 미끄러지듯 굴러갔던 침대는 좁은 수술대 옆에 자리했다. 아직 멀쩡하니 일어나 수술대로 옮겨간다. 딱 사람 하나만 누울 수 있는 좁은 수술대 위에 천장을 보고 눕는다. 시야에는 무영 등과 형광등 빛이 눈부시다. 이리저리 분주한 스크럽 널스와 라운딩 널스의 발걸음이 들린다. 오른쪽 종아리에 혈압계가 감긴다. 조여지는 느낌이 들며 혈압이 측정된다. 왼팔에 달린 검지에 산소포화도 기계가 끼워지는 동시에 산소마스크가 코와 입을 덮었다. "자, 마취의사 입니다. 걱정 마시고 심호흡 다섯 번만 해보세요" 마취의사가 혈압이 높아졌다며 긴장을 풀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간호사에게 약물을 주입하라는 주문을 한다. 코에서 약물 냄새가 확 풍긴다."프로포폴? cc!" 드디어 잠이 들 시간이다. 속으로 숫자를 센다. 셋까지 센 기억이 난다. 그 후의 시간은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것이 아닌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몸을 헤집어도 알길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진정한 사람일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눈을 떠 보라며 남자 간호사가 내 얼굴에 눈을 맞춘다. 수술 부위에 통증이 느껴진다. 입에서는 마취약 냄새가 역하다. 정신이 혼미하다. 눈을 감는 것이 편하지만 자꾸 눈을 뜨라고 한다. "눈 떠 보세요~ 김옥진 님 수술 끝났습니다. 눈 뜨고 계셔야 해요.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애써 눈을 부릅떴다. 축 처진 두 다리에 신박한 물건이 씌워진다. 그것은 따듯한 바람을 내 뿜는 기계였다. 이런! 회복실이 따듯하다니, 좋다 못해 황홀하다. 통증은 충분히 참을 수 있다.
어질어질해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이다. 마음을 졸였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랬을 거라 믿어야지. 내 삶 중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니까.
수술실에 들어간 시간은 오전 8시, 마친 시간은 9시 반, 회복실에서 30분을 보내고 병실로 돌아왔다.
일사천리로 암조직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제는 더 잘 쉬고 좋은 것을 먹고 더, 더 재밌게 살 일만 남는다.
물론 남은 치료도 잘 받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