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딱 42주 1일이다. 내가 기다릴 수 있는 마지노선,+하루가 지난다. 산과학에 적힌 마지노선이다. 임신 42주가 넘으면 금방 아기가 죽을 것 같은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 태반이 늙어서 제 기능을 원활히 못하면 태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도 분만 조차 무리가 갈 수 있다며 그렇게 위험 부담을 안고 자연출산을 시도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제왕절개를 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한다. 물론 통계학 상으로 42주를 넘긴 아기들의 사망률이 높다고 한다.
그런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은 41주경 유도 분만으로 인위적인 진통을, 자궁수축을 만들어 출산한다. 거의 대부분 42주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교과서에만 42주라고 되어 있지 현장에서의 마지노선은 이미 41주로 변해 버린 지 오래다. 그렇게 해도 진통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땐 제왕절개를 하게 된다.
난 산과학을 배웠다.
조산사의 입장에서 그것들과 늘 부딪치는 것은 인간은 유일한 존재라는 거였다. 유일하기 때문에, 각자의 삶이 다르고, 몸이 다르고, 리듬이 다르기 때문에 감히 누군가가 된다! 안된다! 를 외쳐선 안된다고 말했다. 아기가 크거나, 작거나, 일찍 태어나거나 이번처럼 마지 노선을 넘거나, 그런 것들은 다양성과 유일성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모든 아기가 예정일 즈음에 태어난다면 우리는 산과 교과서나 현대 의학을 신격화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잘 안다. 변화되는 것은 '발전 '이 될 수도 있고 '퇴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의학에서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경우는 모두 비정상 인가하는 질문에 도달한다.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조산사인 나는 현대 의학 교과서와 통계의 잣대 앞에서 실제로 속수무책이다. 인간은 유니크한 존재라던지, 다름을 인정하면 훨씬 삶이 편안해진다고 출산을 빗대어 말하곤 하는 내가 비열해 보이거나 무능력함을 인정하는 시점이다.
현대 의학은 어떤 생명이건 생명의 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가 최대한의 경험을 살리고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출산을 돕는 일은 두 생명이 온전할 때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유일한 산모와 아기에게 나는 유일한 경험과 실력으로 그들을 대면해야 한다. 그래서 42주가 다 되어가는 산모에게 막연히 기다리라고만 할 수 없다. 어느 산과 의사가 아기는 때가 되면 나온다며 자연진통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렇게 이야기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리를 들어야만 하고 자칫 의사의 길을 접어야 하는 지경에도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조산사인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오늘, 그녀에게 병원에 갈 것을 권유했다. 양수 양이 여전히 적당한지, 태동검사엔 별 이상이 없는지, 어떤 방법으로 아기를 맞이 할 건지는 아기를 품은 어미 스스로가 결정하시라 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병원을 가기가 싫다고 했다.
뻔한 이야기와 불을 보듯 그다음 시나리오가 그려졌기 때문이었으리라. 제일 걱정되고 속이 상한 사람은 그녀일 텐데 위로는커녕 나조차 겁만 준다. 42주라는 쇠사슬 같은 무게를 그녀가 견디며 행복해질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한참을 고민한 하루가 지난다.
'선생님... 저... 진통 오는 거 같아요. 변도 아침부터 세 번 봤고요. 변 마려운 듯, 아닌 듯, 암튼 배가, 아직은 불규칙하지만 아픈 것 같아요'
새싹이는 왜 지금에서야 태어나려는 걸까? 며칠 일찍 나오면 안 될 이유가 있었을까?
얄궂기도 했지만 얼마나 서로를 위해서 다행인지, 그동안의 시름이 단박에 날아갔다.
'그래요? 우와~~~~ 정말 축하해요'
우리는 날밤을 샜을지언정 즐겁게 아기를 맞았다.
태어나보니 예정일이 지났다는 증상은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제 때에 맞추어 태어난 거다.
제때에 맞추어 나오는 아기에게 우리는"빨리! 빨리!"보자고 못살게 굴었다.
'세상이 이렇구나! 아가야 미안하다! 그래도 잘 태어나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