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유다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선비 May 10. 2018

그릇

노자의 도덕(道德)

   

 여기 선비가 한 명 있다. 이 선비는 아주 고결한 정신을 가졌다. 늦잠을 자는 일도 없었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없었고, 공부를 하지 않는 날 역시 없었다. 사람들은 그 선비를 바라보며 자신을 다듬었고, 그 사람을 찬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했다.   

  

 "여보게들! 여기 이 완벽한 선비의 영원한 상을 바라보시오! 이것 참 훌륭하지 않소?"     


 하지만 이 선비에게는 말 못 할 슬픔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끝없는 허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긴 놈은 왜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도 자신을 다스렸는가? 그렇게도 많은 물을 부었는데도 도대체 이 독에는 물이 채워지지를 않는가? 그렇다고 밑이 빠진 독도 아니었다. 이것이 선비의 슬픔이었다.     


 "더 이상은 안된다. 길을 떠나야지. 저 산등성이에 살고 있다던 도인(道人)에게로!"    

 

 건너 마을 도자기 장인에게 그 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에, 선비는 망설임 없이 길을 떠난 것이다. 결국 도착한 도인의 거처. 선비가 꿈꿨던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허름한 옷에 초췌한 얼굴, 가진 것 하나 없는 모습. 이는 필시 거지의 형색이었다. 허나 발걸음이 아쉬워, 선비는 도인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나는 도대체가 왜 이리 허망한 것이오? 채워도, 채워도 공허함만이 남는데 이게 무슨 일이오? 당신은 내 듣기에 아주 꽉 차있다고 하던데, 어찌 그렇게 채운 것이오?"     


 도인은 빙긋 웃더니 한 마디 던지기를.     


 "나는 채워진 것이 하나도 없소이다. 나를 찾아온 그대처럼 끝없이 공허할 뿐이오."     


 실망한 선비는 도인에게 말하기를.     


 "도자기 장인 놈은 당신이 아주 꽉 차있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내가 헛소리를 들었나 보오. 도대체 차 있긴 뭐가 차 있단 말이오?"     


 도인은 말했다.     


 "그릇은 무언가를 담으려고 있는 것인데, 그릇이 차 있다면 더 이상 채울 수 없으니 그것이 그릇이겠소? 그릇이 그릇이려면 비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오. 나도 그와 같지. 그저 공허함으로만 가득 채울 뿐이지. 비워져 있지만 채워져 있고, 채워져 있는 것보다 채워져 있지"     


 선비는 산을 내려와 그 뒤로 다시는 책을 잡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학사에서 건진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