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철학 편 - 1. 쾌락을 얻기 위한 방법 A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조대감 댁 대궐에서는 오전 내내 천자문 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 황 날일 달월..." 수경낭자는 최근 아버님께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컸으니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느끼신 아버님의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아버님께서 한문을 술술 써 내려가시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입이 쩍 벌어졌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계속 외우다 보니, 이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공부만 하고 있는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공부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친구인 국희낭자는 이윤도령이랑 꽃놀이를 갔다는데 마냥 부럽기만 했다(나는 천자문을 외워야 한다 말하니 위로는 안 해주고 되려 놀리기까지 했다). 글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아버님 말씀만 따르다가는 몸져누울 것 같아서 수경낭자는 아버님께서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틈을 타 저잣거리로 몰래 빠져나왔다. 사실 오늘은 저잣거리에서 남사당놀이가 있다고 해서 더욱 공부에 집중이 안 되던 터였다.
수경낭자가 저잣거리에 나오니 남사당놀이가 한참이었다. 서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역시나 오선비도 남사당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수경낭자 호호 오선비님도 남사당놀이를 구경하고 있으시네요?
오선비 허허 이게 누구요 수경낭자가 아니오? 그렇소. 오래간만에 저잣거리가 떠들썩하구려.
수경낭자 네 그러게요. 매일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만 구경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선비 허허 하지만 그것도 며칠이지 매일 놀기만 하면 분명 따분해질 거요.
수경낭자 정말 그럴까요? 매일 놀기만 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할 것 같은데요?
오선비 허허 그렇게 한번 해보시오. 내가 몇 년째 이렇게 놀아보니 지루해져서 몸져누울 판국이오.
수경낭자 노는 것이 지겨우셨다니 그럼 오선비님은 어디서 즐거움을 찾죠?
오선비 껄껄 그것 참 재미있는 물음이오. 만약에 수경낭자는 노는 것이 지겨우면 무엇을 하시겠소?
수경낭자 음... 노는 것이 지겨워 본 적은 없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지겹다고 생각했던 천자문을 외우거나, 잠을 자거나... 사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오선비님은요?
오선비 허허 내가 직접 겪어보니 계속 놀기만 한다는 건 참으로 지겨운 것이었소. 그래서 나는 차라리 즐겁기를 포기했소. 즐겁기를 포기하니까 신기하게도 아주 사소한 것들이 즐겁기 시작하였소.
수경낭자 즐겁기를 포기하니까 되려 즐거워지셨다고요?
오선비 껄껄 그렇소이다. 수경낭자도 즐겁기를 포기해 보시구려. 그럼 지나가는 개만 봐도 즐거워지더라오. 저기 마침 개가 지나가는구려. 저것참 재밌지 않소? 배꼽이 떨어질 것 같소이다.
수경낭자 호호 그런 방법도 있군요? 하지만 저는 아직 엄청나게 놀아본 적이 없어서, 지금은 즐겁기를 포기하기보다는 즐거워지고 싶네요?
오선비 껄껄 그것도 방법이긴 하오. 하지만 즐겁기를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듯하오. 내 즐겁기를 포기하니 수경낭자의 고운 볼만 봐도 즐거워지는구려.
수경낭자 어멋!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례하시군요! 저는 이만 아버님께 돌아가 봐야겠어요!
오선비 껄껄껄
헬레니즘 철학의 개관에서 보았듯이, 이 시기에는 개인주의적인 입장과 회의적인 입장이 팽배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는 기반인, 확실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쾌락적인 측면만큼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쾌락주의를 옹호하는 여러 사상들과 학파들이 생성되었다. 쾌락주의를 옹호했던 학파는 크게 두 학파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퀴레네~에피쿠로스학파로 이어지는 쾌락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퀴니코스~스토아학파로 이어지는 쾌락주의였다.
* 퀴레네 ~ 에피쿠로스 학파
먼저 알아볼 학파는, 퀴레네 ~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이 학파는 쾌락주의의 윤리적인 측면을 최초로 옹호하면서 나온 학파이다. 이들은 쾌락만이 진정한 선이요, 그 밖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쾌락을 산출할 수 있는 효용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퀴레네 학파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리스팁푸스라는 철학자이다. 아리스팁푸스는 우리는 세계 자체의 본성을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경험들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적어도 쾌락의 가치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그는 쾌락을 옹호하였다. 아리스팁푸스는 "행복은 쾌락의 총계이다"라고 말했다. 아리스팁푸스이게 훌륭한 사람이란, 자기가 선택하는 것에서 초래될 듯한 총체적 결과를 유념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행동하려면 식견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의 식견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지혜의 덕과는 다른 의미이다. 그가 말하는 식견은 초월적인 가치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득과 실의 세속적 이해타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팁푸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데모크리토스는, 아리스팁푸스와는 다른 쾌락을 추구하였다. 아리스팁푸스의 쾌락주의는 회의적인 태도에 바탕을 두었다면, 데모크리토스는 온건하고 규율적인 것에 바탕을 두었다. 그는 격렬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감각적인 쾌락을 배척하였으며, 진정한 쾌락이란 자연의 전체적인 진행과 조화를 이룰 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 데모크리토스는, 예전에 한 번 다루었던, 원자와 관련된 그 데모크리토스가 맞다.
마지막으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대한 견해를 알아보면, 이 역시도 쾌락주의를 옹호하기는 하였지만 그 기반을 어디에 두는가에 차이가 있다. 아리스팁푸스는 회의주의에 기반을, 데모크리토스는 온건하고 규율적인 것에 기반을, 에피쿠로스는 좌절 의식에 기반을 둔 쾌락주의였다.
에피쿠로스는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에 집과 정원을 마련해 주어서, 이후로 아테네에 정착하였다. 그는 아테네에 정원(garden)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아테네의 네 학원 중 세 번째 것이다(참고로 첫째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망명생활로부터 얻은 경험 때문이었는지, 세상은 오로지 적의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이 추구하는 선(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세상과 벽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벽에 해당하는 것이 자신이 세운 학교인 정원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이 적의에 찬 세상에서 그나마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는 욕망을 자제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행복=성취/욕망, 일반적으로는 성취를 높여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 에피쿠로스는 반대로 욕망을 줄여서 행복을 높이는 주의였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루크레티우스(로마의 시인)의 서사시에 잘 표현되어져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이 세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자연에는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다. 인간은 그 세계에서 우연적으로 얽혀 살아갈 뿐이고 이것이 복잡해져서 불행이 따르게 되었다... 자연의 자원을 사유재산으로 분배하여 가지는 습관, 그리고 금을 부(富)의 기본 형태로 규정짓는 것 등으로 야심, 탐욕, 전쟁, 범죄 등의 수없이 많은 악이 생겨났다"
세상에는 숭고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플라톤의 견해와는 완전히 상반되어 있으며, 회의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에피쿠로스는 이 적의에 찬 세상을 피해 세상과의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욕망을 절제하며, 그로 인해서 그나마 얻을 수 있는 행복이나 쾌락에 만족을 하는 주의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온하고 행복한 정신적인 쾌락의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하였다.
헬레니즘 철학 편 - 2. 쾌락을 얻기 위한 방법 B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