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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Jul 02. 2018

현상학 들어보셨나요?(1)

후설, 그는 누구인가?


 현상학이라는 말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마 철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아니면 생소하실 텐데요. 그래서 이 글을 준비했습니다. 예전에 현상학 관련 책을 읽다가 정리해둔 글인데 조금씩 나누어서 연재하겠습니다. 정리용으로 쓴 글이어서 약간 딱딱할 수 있지만, 참고 읽으시다 보면 좋으실 겁니다. 아마도



- 목차


현상학 들어보셨나요?(1) - 후설, 그는 누구인가?

현상학 들어보셨나요?(2) 후설 철학의 동기와 이념

현상학 들어보셨나요?(3) 후설 현상학에서 태도의 문제

현상학 들어보셨나요?(4) 판단중지와 환원

현상학 들어보셨나요?(5) 본질직관

현상학 들어보셨나요?(6) 의식과 세계

현상학 들어보셨나요?(7) 생활세계

현상학 들어보셨나요?(8) 마지막 사랑의 공동체





후설



수학자에서 철학자의 길로


 후설은 현상학의 창시자로서 20세기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다. 후설은 본래 철학자가 아닌 수학자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박사논문 역시 수학적인 주제를 논하였다. 그는 수학이 지닌 학문적인 엄밀성과 정밀성에서 진리 탐구에 대한 가능성을 엿봤을 것이다. 하지만 후에 빈 대학에서 '브렌타노'의 강의를 듣고, 철학 역시 엄밀한 하나의 학문성을 갖출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철학자로 전향하게 된다. 후설은 자신의 학문적 전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게 평생의 작업으로서 철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확신, 즉 철학 또한 진지한 학문의 분야이며, 그 또한 가장 엄밀한 학의 정신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고, 그렇게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브렌타노의 강의를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후설의 학문적 삶은 '철학이 지닌 학문성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되어 있다. 물론 이 물음으로만 후설의 철학이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하나의 큰 물음으로 끝까지 자리 잡은 것은 확실하다.




무전제성의 요구


 후설은 역사상 그 어느 철학도 엄밀한 학이라는 참된 이상을 실현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엄밀한 학의 이념은, 사실 철학이 그 출발부터 지닌 것이지만, 이제껏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이 후설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이 철학적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후설이 말하는 엄밀성이란 방법적 절차의 정확성이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학적 진리의 기준으로 여겨져 온 객관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후설이 말하는 엄밀성이란, 탐구하고자 하는 사태 자체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말한다. 즉, 주어진 사태에 얼마나 충실하며, 이를 왜곡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느냐가 후설이 추구하는 학적 엄밀성의 조건이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사심 없는 열린 태도다. 이러한 열린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편견이나 사심에 의해 이끌림 없이, 또한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이른바 '무전제성의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성에 대한 진지한 요구를 제기하는 인식론적 탐구는 이미 강조된 것과 같이 무전제성의 원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사실 무전제성의 요구는 전통적인 철학의 기본 요구이기에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철학은 이 무전제성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 철학은 어떠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객관주의가 지닌 편견


 후설은 철학에는 조금이라도 부당한 전제나 편견이 개입되어 있으면 안 되며,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후설이 주목하는 가장 큰 편견은 바로 서양철학과 과학을 일관되게 규정해온 객관주의이다. 객관주의란, 정신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를 전제로 하고, 여기에 참된 진리의 근거가 있다고 보는 철학적 태도 내지 세계관이다. 즉, 객관주의의 이념은 진리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진리의 기준을 주관성이 아닌 객관성에 두면서 최대한 주관성의 개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이처럼 진리의 시금석을 비주관적인 객관성에 둔다.


 하지만 후설이 보기에 객관주의는 하나의 편견이다. 객관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 있고 강력하게 받아들여져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객관주의가 이렇게 강하게 자리 잡혔는가? 후설은 우리의 일상적 태도 자체가 객관주의와 친밀성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우리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도 참되게 실재한다고 믿고 있다. 후설은 이러한 태도를 이른바 '소박실재론'이라고 비판한다. 믿음이 하나의 철학적 지식이 되려면 별도의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객관주의에 물든 전통 철학은 이러한 과정이 이상하게도 생략되어 있다. 즉, 일상적으로 통용된 상식을 그대로 보편적인 지식인 양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우리와 독립되어 그 자체로 실재한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바로 여기에 객관주의적 태도의 뿌리 깊은 편견이자 맹점이 있다고 후설은 진단한다. 도대체 인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가 참되고 근원적이라는 철학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즉, 이런 의미에서 객관주의를 맹종하는 철학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소박하다.


 "고대와 근대의 철학들은 소박하게 객관주의적이었고, 또 그런 채로 여전히 남아있다."


 후설은 철학이 모름지기 참된 학문으로서, 이른바 엄밀한 학이 되고자 한다면, 조금이라도 어떠한 근거 없는 전제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철저히 무전제적이어야 한다고 본다(후설은 자신들도 모르게 사로잡혀 있는 객관주의적인 세계관은 이미 무전제적이 아님을 지적한다). 이제 후설은 철학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만들고자 꾀하면서 이를 위해 객관주의에 물든 전통 철학의 편견을 극복하고자 한다.




후설에 대한 오해


 이러한 무전제성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후설이 철학의 출발점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 혹은 주관성(초월론적 주관성)이다. 후설은 엄밀한 학문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의식의 주관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엄밀함과 주관성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요소의 혼합은 사실상 구체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적인 이론의 체계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일면에서는 타당한 비판 일지 모르나 후설 철학의 전체, 특히 그의 후기 철학을 놓고 보면 섣부른 판단이다.




후설의 삶과 철학


 후설은 세계 1차 대전에서 둘째 아들의 죽음을 겪는다. 여기서 후설은 아마도 깊은 슬픔과 더불어 역사적, 시대적 현실의 부조리성을 절감하면서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에 나치가 정권을 잡은 이후, 급박한 독일의 상황 속에서 유태인인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굴욕 역시 그의 철학적 태도에 큰 의미를 주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삶과 철학이 결코 역사적인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체험했으며, 그의 '사랑의 공동체'와 같은,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평화 윤리적 인류 공동체의 이념은 아마도 이러한 그의 시대 경험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시대의 광기 앞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기 책임성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 또한 후설은 직감했다.


 후설의 후기 철학에서 그의 철학적 주제를 '세계'라고 하지 않고, '생활세계'라고 표현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생활세계의 개념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철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후설은 생활세계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구체성과 역사성의 담지자로 인식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철학이 현실을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는 철학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이 많이 딱딱하죠? 제가 읽으려고 정리해둔거여서 잘 읽히지는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차분히 연재분을 읽으시면 지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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