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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Jul 06. 2018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17

헬레니즘 철학 편 - 4. 태양이 빛을 비추지 않는 곳은 없다 A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편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신(新) 플라톤주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읽게 되면 호흡이 길어져 흥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언제나 그랬듯 두 편으로 나누어 연재하겠습니다:)




 수경낭자는 오선비와의 이야기 후에 다행히도 허무감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었다. 오선비의 말대로 회의적인 감정은 진리를 알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인 측면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며, 회의 자체에 빠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무한 감정에서 벗어나니 오랜만에 국희낭자도 만나고, 하늘도 바라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다. 수경낭자는 산언저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따뜻한 햇볕을 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 오선비와 이야기했었던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라는 의문이 다시 한번 들었고, 혹시 저 태양의 빛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태양은 만물을 비추어주고 생장시키니 참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양이 없었다면 식물들도 자라나지 못하고, 사람들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태양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선에도 저런 별들을 관찰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 사람들은 저런 아름다운 별들을 항상 보고 있으니 참 행복할 것 같았다. 수경낭자는 그러다가 문득 오선비는 저 태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기분이 좋은 수경낭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잣거리로 향했다.




수경낭자  안녕하세요 오선비님 오늘은 아주 누워계시네요?


오선비  허허 이게 누구요 수경낭자가 아니오? 그렇소.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드러누워 햇볕을 쐬고 있소만?


수경낭자  호호 팔자 좋으시네요.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네요!


오선비  그렇소. 저 태양이 없었다면 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을 것 같구려.


수경낭자  오선비님도 저 태양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계셨군요? 저도 동산에 누워 있다가 태양이 참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선비  껄껄 그런 생각을 했소? 재밌구려. 그런데 수경낭자는 태양이 왜 고맙게 느껴지는 것이오?


수경낭자  그야 이렇게 따뜻함도 주고, 우리가 먹는 작물들도 자라나게 해 주고 이것저것 고마운 것이 많지요


오선비  그렇구려. 수경낭자 말이 맞소. 저 햇볕이 미치지 않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오. 물론 밤에는 아니겠지만 말이오.


수경낭자  네 맞아요. 햇볕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항상 따뜻하고 밝기만 하면 좋을 텐데 어둠은 왜 있는 것일까요?


오선비  껄껄 어둠이 있다고 하셨소? 아니오. 어쩌면 어둠은 없는 것일지도 모르오.


수경낭자  어둠이라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것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밤이 되면 어둠이 오잖아요.


오선비  나는 약간 다르게 생각하오. 그건 어둠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빛이 옅어지는 것이오.


수경낭자  빛이 옅어진다고요?


오선비  그렇소. 빛이 옅어져서 마치 어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악함이라는 것도 선함이 희박한 상태일 뿐 애초에 악함이라는 것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구려.


수경낭자  흐음...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인데요?


오선비  껄껄 재미있다니 다행이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누워서 수경낭자의 얼굴을 바라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마치 하늘에 떠있는 태양 같소. 나에게도 빛과 같은 그대의 입술을 좀 주시면 안 되겠소?


수경낭자  어멋!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례하시군요! 저는 이만 아버님께 돌아가 봐야겠어요!


오선비  껄껄껄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적 분위기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회의적인 경향 그리고 기독교의 태동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크게 보면 쾌락주의, 회의주의, 신(新) 플라톤주의, 원시적인 형태의 초기 기독교의 사조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알아볼 사조는 세 번째인 신플라톤주의이다. 신플라톤주의는 후에 기독교의 발판이 된 중요한 사조 이기도하다.


플로티노스


 오늘날 신플라톤 철학이라는 말은 철학자 플로티노스에서 시작된 철학이라고 말한다. 물론 신플라톤 철학이라는 말은 플로티노스가 의도한 것은 아니고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만 당시의 플로티노스는, 자신이 플라톤의 진정한 철학적 견지를 부흥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왜 플라톤 철학을 부활시키려 한 것일까? 바로 헬레니즘 시기에 들어서 아카데미아에(플라톤의 철학학교, 아테네의 제 1 학교) 깊숙이 들어온 스토아주의나 회의주의 그리고 기타 헬레니즘의 퇴폐적인 요소들과 싸우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흐리고 있다는 걱정이었을지도 모르고, 혼란스러운 사조의 분위기가 대두하면서 다시 전통으로 돌아가서 길을 찾으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 철학은 말 그대로 플라톤 철학을 모티브로 삼고 있음은 당연하다. 플라톤의 철학은 당시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그리고 플로티노스에게로 전해져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되었는데, 그 차이점을 간단히 살펴본 후에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선 그 시발점이 된 플라톤 철학은 세계를 이데아계와 현상계(현실세계)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철학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주의(자연적인 흐름을 중시하는 자연주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을 연구한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를 기반으로 다원적인 입장이었다. 마지막으로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입장을 극복하기 위하여(단절된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연결하기 위해서) 일원론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의 철학은 그가 강의를 할 때 활용했던 강의록을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가 편집한 '엔네아데스'라는 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입장을 극복하고자 일원론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당시에 성행했던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한 신(新) 피타고라스 학파나 그노시스주의 학파 등을 배격했다. 신 피타고라스 학파나 그노시스주의 학파는 이번 챕터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사조는 아니므로 따로 기술하지는 않겠지만, 간단히 말해 현실세계에서 각자의 마음가짐을 통해서 더 나은 세계로의 구원을 원했던 학파들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플로티노스는 세계가 이데아계와 현상계처럼 두 개의 왕국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존재계열(存在系列)만이 있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플로티노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여기서의 존재는 꼭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서열을 매기려고 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플로티노스 철학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의 개념은 일자(一者, the one), 유출(流出), 만물복귀(萬物復歸)의 개념이다.


모네, <인상, 해돋이>


 먼저 일자(一者, the one)의 개념부터 알아보자. 일자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매개하기 위한 형이상학으로 볼 수 있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일자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선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나온다 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는 우리가 고찰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의 논리적인 전제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론적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플로티노스는 오직 일자만이 완전하고 충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출(流出)의 개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디에서? 바로 일자에서. 일자는 너무도 완전하고 충만하기에 생명력이 흘러넘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흘러넘치는 생명력을 유출이라고 보면 된다. 일자와 유출은 플로티노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직관적으로 다가올 듯하다. 하나의 거대한 광원이 있는데(태양을 떠올려도 된다) 이 광원은 아주 높이 빛나고 그 충만한 광휘 때문에 모든 빛을 자신 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사방으로 뿜어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태양(일자)으로부터 나오는 빛 덕에 지구(만물)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플로티노스에게 일자는 신이나 절대적인 선 그 자체에 대한 상징적인 이름이었고, 일자는 존재하는 어떤 사물은 아니지만 모든 존재자(존재하는 것들)들에 앞서서 존재하며, 충만함이 흘러넘치지만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는 어떤 것이었다. 


"일자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진술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라고 진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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