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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Jul 16. 2018

현상학 들어보셨나요? (7)

생활세계


- 목차  


현상학 들어보셨나요?(1) - 후설, 그는 누구인가?

현상학 들어보셨나요?(2) - 후설 철학의 동기와 이념

현상학 들어보셨나요?(3) - 후설 현상학에서 태도의 문제

현상학 들어보셨나요?(4) - 판단중지와 환원

현상학 들어보셨나요?(5) - 본질직관 

현상학 들어보셨나요?(6) - 의식과 세계

현상학 들어보셨나요?(7) - 생활세계

현상학 들어보셨나요?(8) 마지막 - 사랑의 공동체






생활세계의 개념이 갖는 의미


 생활세계의 개념은 후설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개념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자신의 초월론적 현상학의 정당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개념임은 확실하다. 후설의 '위기'의 한 부분의 제목을 '선 소여 된 생활세계로부터 출발해 되물음 속에서 현상학적 초월론 철학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말하자면 생활세계 개념은 자신의 완성된 철학 체계인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자 실마리인 것이다.


 생활세계의 개념만 두고 본다면 이는 현상학만의 고유한 개념이라기보다는 20세기 현대철학의 중심개념에 가깝다. 구체적인 인간적 삶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활세계 개념은 메를로퐁티, 슈츠, 하버마스 등의 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생활세계 개념이 갖는 중요한 철학사적 의의는 주관과 객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양자의 중간영역으로서의 세계 개념, 보다 구체적으로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통일된 세계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주관과 객관의 통합을 시도한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그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근원을 캐물어 현상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은 그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생활세계 개념 도출의 근본 의의는 객관주의적 혹은 자연과학적 태도가 우리의 실제적 삶의 세계인 생활세계를 망각하게 했다는 비판에 있다. 후설에 따르면 이러한 생활세계에 대한 망각이 곧 현대 학 일반의 위기로 이어진다.




학의 위기와 그 원인


 후설은 당대 학들이 전반적으로 실증주의적 경향을 띠고, 오로지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경험적 사실성에만 관심을 갖는 풍토를 비판한다. 인간에게 절실한 문제는 도외시한 채, 오직 방법적인 객관성과 엄격성만을 강조함이라 진단했다.


 "우리의 삶이 곤란에 빠져 있을 때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 실증적 학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 우리의 불행한 시대에서 가장 운명적인 변혁들에 내맡겨진 인간들에게 절박한 물음, 즉 전 인간적 현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성에 대한 물음을 학은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실증적 학의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주관적 삶을 오로지 객관적으로 확증 가능한 사실성으로 환원시켜 버림으로써 주관성 자체를 추상화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주체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양화 가능한 존재로 대상화된다. 


 "단순한 사실학은 단순한 사실적 인간을 만들어 낼 뿐이다."


 "실증주의는 말하자면 철학의 목을 잘라버렸다."


 이러한 당대의 실증적 학의 인간적 삶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이로 인한 철학적 의미의 상실 등의 현상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후설은 '학의 위기'로 규정한다. 근대 이후 학이 인간 삶을 지배하는 한, 학의 위기는 동시에 인간 삶 자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즉, 참된 의미의 학은 인간의 삶을 고려하고 이와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태가 어디서 유래했는가? 후설은 학의 위기의 근원이 기본적으로 이러한 실증적 학 자체가 지닌 학문적 성격에 기인한다고 본다. 후설의 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학문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고, 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성에 대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위기는 길을 잃은 합리주의에 그 근원이 있다."


 이 잘못된 방향의 합리주의가 바로 객관주의다. 후설의 비판 초점은 곧 객관주의적 태도다. 객관주의적 학문성의 특징은 엄밀한 학문성을 위해 주관성을 희생시키고 오직 객관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근대에 이르러 가속되는데, 근대의 수학적 물리학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제 후설은 이러한 경향이 강화된 근본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한다.




망각된 생활세계


 객관주의가 서구 철학 내지 과학사에서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유는 무엇일까? 객관주의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그 이유를 후설은 '이념화'방법에서 찾는다.


 이념화란 유한한 경험적 현실을 초월해 무한성 속에 놓여 있는 극한 형태로서의 이념적 대상을 산출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얻어낼 수 없고 오직 '순수 사유의 이념적 실천'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이념화는 한 마디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열망을 사유의 세계에서 충족시켜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념화는 곧 '완전화로의 실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들 수 있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우리의 유한한 경험을 초월한 완전자로서의 이념적, 형이상학적 존재를 전제함으로써 철학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객관주의는 이러한 이념적 존재의 기반 위에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유한한 경험을 초월한 이 이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그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좋은 예가 바로 수학, 그중에서도 특히 기하학이다. 기하학은 사실 이러한 이념화의 방법을 토대로 하는 학적 체계다.


 수학적인 이념화의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한성 개념이다. 이 무한성의 개념을 전제하면서, 우리의 사유 속에서 이념화한다. 이념화의 방법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념적 존재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념화는 여전히 하나의 방법이고, 이념화를 통해 산출된 것은 말 그대로 사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이 이념적 대상은 경험적 현실 내지 실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경험적 현실과 이념적 존재와의 괴리 문제는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근대로 넘어와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곧 세계 전체가 철저히 인과성의 원리에 따라 수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기하학적인 공간을 넘어 색, 음, 열 등과 같은 감성적 성질의 영역도 이념화, 수학화 되었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인 지표로써 양화 된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이러한 '완전히 구체적인 사물을 포착하는 이념화'를 가능하게 한 사람이 바로 근세 물리학의 개척자인 갈릴레이다. 갈릴레이를 통해 세계의 전면적인 수학화와 이념화가 가능해지면서 세계 전체는 보편적인 인과성의 원리에 따른 하나의 수학적 구조물과 같이 파악되기 시작하고, 이후 객관주의는 더욱 견고해지고 극단화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세계를 수학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지만, 우리를 직접적 경험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세계를 이념화하고 이를 수학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수학적으로 규정된 세계만이 참된 세계이고, 우리가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세계는 주관상대적인 세계로서 철학적 가치의 면에서 떨어진다고 볼 경우에 문제가 된다. 갈릴레이적 세계관은 이미 이러한 차별적인 태도를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이 수학적 세계관은 별다른 교정 없이, 말 그대로 소박하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현대까지 이어져 학의 위기로 이어졌다고 후설은 진단한다.


 후설이 보기에 갈릴레이의 결정적인 실책은 바로 단순한 방법의 산물을 참된 존재인 것으로 착각했다는 데 있다. 이념화란 하나의 방법이고, 방법을 통해 구축된 체계도 사실은 실제 존재라기보다 방법의 부산물인데, 이것에서 진리성과 실재성을 부여해왔다. 이는 실제 세계의 의미를 철저히 왜곡하고 망각했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구축된 이념적 세계는 실제로 지각 속에서 주어지고 그때그때 경험되고 경험 가능한 세계, 즉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와 교묘히 바꿔치기했다."


 후설은 근세의 자연과학은 인간과 세계의 참된 의미를 찾는 심오한 학문적 통찰을 지향하기보다는 이념과 기호의 세계에서 지극히 방법적이고 기술적인 절차에만 매몰됨으로써 점차 '단순한 기술'로 전락해버렸다고 말한다. 때문에 학의 근원적이고 고유한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후설은 자연과학이 단지 이념화의 방법을 통해 생활세계에 '이념이라는 옷'을 입혔을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현상학은 그 옷을 벗겨내고 생활세계 자체를 주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생활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 근세 자연과학, 나아가 서구의 객관주의가 은폐시킨 생활세계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념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순수하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인 세계, 후설의 표현에 의하면, '선과학적인 세계'로 귀환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


 후설의 생활세계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통 철학과 과학에 의해 제대로 주제화가 안 된 원초적인 세계다. 후설은 이념적 대상으로서의 세계란 단지 방법의 산물로 특수한 '목적에 따른 형성물'일뿐, 이 자체가 실제적, 보편적 세계를 대변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후설의 보편적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규정이 나타난다. 곧 지평으로서의 세계 개념이다. '지평'이란 사실 일상적 개념으로서 한 주체가 어떤 것을 바라볼 때 갖게 되는 '시야의 한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한계성과 범위가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삶의 지평, 한국인의 지평, 역사적 지평, 수학의 지평 등의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후설의 지평 개념은 다소 인식론적이다. 즉, 우리의 대상 경험이 지니는 초월적인 성격, 주어진 것을 넘어서 더불어 의식하는 경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의 지평은 한계보다는 연관성과 확장성이 강조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그것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환경 역시 바라보게 된다. 곧, 나의 모든 일상적 대상 경험은 이 대상만을 고립되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다른 것들까지 더불어 경험한다. 이러한 모든 개별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배경, 직접적으로 경험된 것을 넘어서 하나의 연관을 이루는 배경을 가리켜 후설은 '지평'이라고 부른다.


 이 지평은 임의로 형성되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 연관 속에 있다. 우리가 집을 떠올릴 때 집 주변의 풍경들도 함께 생각할 수 있음은 집과 풍경이 어떤 유의미한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관의 실마리는 바로 내 경험의 실천적 가능성에 놓여 있다. 가령, 내가 집의 앞면만을 지각할 때, 나는 장차 뒷면을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집의 뒷면까지 더불어 의식하면서 지각한다. 즉, 현재는 직접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장차 내가 경험할 수 있다는 실천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관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경험이라는 것이 전혀 원칙 없이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한 경험의 진행에 앞서, 하나의 절대적이고 확고한 틀이 예시된다."


 가령, 내가 집을 보면서 가보지도 않은, 또 갈 수도 없는 먼 우주의 별과 연관시켜 이를 배경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지평의 형성에는 미래적 가능성보다는 과거에 축적된 경험적 지식, 기억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즉, 습성화된 경험과 지식으로 인해 우리는 아무리 낯선 상황에서라도 나의 인식 틀에 따라 나름대로 세계를 정형화하고 친숙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나의 가능한 실천적 경험이 어떤 규칙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 하에 형성된 '경험 대상들의 의미의 연관체'가 바로 지평이다. 쉽게 말해, 지평은 우리 습성의 상관자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개별적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보편적 지평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 곧 후설적 의미에서의 '생활세계'이다. 




생활세계 주제화의 어려움


 지평으로서 생활세계를 규정했다는 것만으로도 후설의 현상학은 큰 철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의의 중 하나는 세계를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세계는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대상과 같이 존재하지 않고, 이에 대해 복수가 무의미한 유일성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지평으로서의 세계는 대상의 배경이 될지언정, 결코 대상으로서 주어지거나 주제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의식의 지향적 작용에 의해 구성된 것은 원칙적으로 대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후설이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해명하는 한, 이 세계는 대상화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에 후설은 그의 후기에 이르러 '지향적 지평의식' 혹은 '지평지향성'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비대상화적인 지향성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생활세계에 관한 학


 생활세계에 관한 학의 목적은 생활세계를 이른바 학적으로 주제화하겠다는 것이다. 엄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을 추구해온 그에게, 자신의 현상학의 사실상 최종적 목적지인 생활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학을 정립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현상학은 살펴본 대로 본직직관의 방법을 이용하는 본질에 관한 학이다. 여기서 문제는 생활세계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사실 생활세계는 특정한 세계 내의 대상이 아니므로, 본질직관을 하기 위해 필요한 출발점이 되는 임의의 개별적인 생활세계를 선정하기가 쉽지 않다. 살펴본 대로 생활세계는 원칙적으로는 어떤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는 그 안에 무수한 개별적 지평을 함유하고 있는 세계라는 점이다. 즉, 하나의 보편적 생활세계는 이와 연관성을 이루는 개별적, 특수한 지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개개의 문화 세계는 보편적인 하나의 유일한 세계의 현출 방식들이다."


 따라서 보편적 생활세계의 본질직관을 위한 출발점으로 개개의 특수한 문화 세계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해 보이는 보편적 생활세계는 몰라도 나 자신이 속한 구체적이고, 또 자라 온 나의 문화 세계로서의 생활세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으며 주제화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좁은 의미의 생활세계 곧, 개개의 문화 세계를 의식함을 통해 넓은 의미의 보편적 생활세계가 지평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한 개별적 문화 세계를 선정해 충분히 자유변경을 하여 변양체를 만들어가면서 본질직관을 시도할 경우, 이른바 생활세계의 본질이 추출될 수 있다. 후설은 이렇게 파악된 생활세계의 본질을 특별히 '생활세계적 아 프리오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후설은 생활 세계적 아 프리오리가 객관주의적 학에 의해 추구되는 이른바 '보편적인 객관적 아 프리오리'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개별적 내용을 보편적인 개념 속으로 해소시킨 추상적, 논리적 구조인 반면, 전자는 개별적, 주관적 내용을 바탕으로 이를 포괄하면서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른바 '구체적, 실질적 아 프리오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후설은 생활세계의 본질적 구조로 '생활세계적 아 프리오리'를 탐구하는 것을 특별히 '생활세계의 존재론'의 과제로 본다. 하지만 이는 초월론적 관심 없이 자연적 태도에서 수행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는 초월론적 현상학의 틀 속에서 궁극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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