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세계
- 목차
현상학 들어보셨나요?(1) - 후설, 그는 누구인가?
현상학 들어보셨나요?(2) - 후설 철학의 동기와 이념
현상학 들어보셨나요?(3) - 후설 현상학에서 태도의 문제
현상학 들어보셨나요?(4) - 판단중지와 환원
현상학 들어보셨나요?(5) - 본질직관
현상학 들어보셨나요?(6) - 의식과 세계
현상학 들어보셨나요?(7) - 생활세계
현상학 들어보셨나요?(8) 마지막 - 사랑의 공동체
의식과 세계
후설 현상학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주제는 의식과 세계와의 관계다. 사실 후설의 현상학은 이 문제로 시작해서 이 문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후설 현상학을 둘러싼 많은 논란은 후설의 의식과 세계 개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후설은 세계 자체의 존재론적 실체적 규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먼저 해명한 후, 이 의식에 세계가 어떻게 주어지는지, 의식은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 문제에 접근한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의식에 드러난 세계의 모습(현상)이고, 이를 근거로 세계 자체에 접근한다는 의미이다. 최소한 의식을 통해 주어진 것만큼은 어떤 선입견이나 불확실성에 의해 매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후설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설의 철학에서는 의식에 대한 분석이 세계에 대한 분석에 방법론적으로 선행한다. 이는 세계에 비해 의식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듯 보여 유아론의 인상을 주지만 후설의 주된 초점은 의식과 세계의 차별화와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결합성에 있음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 다만 이 결합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이 후설의 궁극적인 과제이다.
"인식하는 이성이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곳에서 이성과 존재는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
의식과 사물이 주어지는 방식의 차이
후설은 의식, 정확히는 의식 체험이 지각되는 방식과 외적인 사물이 지각되는 방식을 엄격히 구분하며, 이 구분을 통해 사물에 대해 의식 체험이 지니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후설은 '내재적 지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지각 대상인 체험과 지각작용 자체가 하나의 체험류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즉, 내재적 지각 속에서는 지각과 지각된 것이 모두 동질적인 의식체험의 범주에 속하며, 그 범주 내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반면, 외적 대상에 대한 지각은 일종의 초월적지각으로 지각작용과 지각대상은 의식 속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지 않는다. 지각작용 자체는 의식체험인 반면, 지각대상은 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차이는, 의식체험과는 달리 외적 사물은 전체가 온전히 지각되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면만 보이는 것이다.
"사물은 음영을 통해 주어진다."
명증성
후설은 의식체험과 사물의 소여방식 차이를 명증성의 차이로 구분한다. '어떤 것이 그 자체로서 온전히 주어짐'과 '그 존재성이 의심할 바 없음'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만족할 때, 후설은 이를 명증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여기서 전자를 '충전적', 후자를 '필증적'이라고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한 마디로 어떤 대상이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주어지거나 인식될 경우, 이를 명증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명증의 또 다른 표현은 대상의 '자기소여성'이다. 대상이 있는 그대로 주어지거나 자기를 드러낼 때, 이 명증성을 충족한다. 사실 인식론적으로 인식의 이상이자 목적이기도 한 이 명증성은 후설의 철학에서 진리의 기준으로 간주되며, 이 명증성을 근거로 후설은 현상학의 방법론적 규범들은 모두 이 명증성 개념으로 수렴된다.
이렇게 현상학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은 명증성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곳으로 후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바로 '의식체험'이다. 이에는 후설의 주관적인 의견을 넘어 나름의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바로 의식체험의 탁월한 소여방식 때문이다. 의식체험은 사물과는 달리 그 자체로 음영 지지 않은 채 온전히 주어질뿐더러, 체험 자체가 그 존재성을 보증할 만큼 확실하다. 명증적인 의식주관을 출발점으로 하는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바로 여기에서 정당성의 근거를 갖는다.
초월론적 의식의 절대성
후설의 초월론적 의식은 경험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마치 하나의 형이상학적 존재인 것처럼 여겨진다. 사실 후설은 초월론적 의식이 이러한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규정을 지니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를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규정은 원칙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갖고자 하는 현상학의 본래 취지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후설은 초월론적 의식이 세계 존재에 대한 믿음의 배제를 통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초월론적 의식은 세계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의식의 존재 성격을 가리켜 '절대적'이라고 부른다. 판단중지를 통한 '세계무화의 잔여로서의 절대적 의식'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자신의 존재를 위해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의식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의식의 절대성과 세계의 의식 의존성의 의미
후설이 말하는 의식의 절대성은 세계에 대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상대적인 절대성이다.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 권능을 갖는 신적인 존재가 지니는 절대성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 의식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세계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세계는 이러한 의식과 연관해 절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후설은 주장한다. 즉, 의식은 그 자체 완결된 존재 연관으로서 여기로 어떠한 것도 침투해 들어가거나 여기에서 어떤 것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의 연관인 반면, 세계는 의식에 대해 단순히 존재의 이차적, 상대적 의미를 지니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이다.
"초월적인 사물의 세계는 전적으로 의식, 그것도 논리적으로 사유된 의식이 아닌 현실적인 의식에 의존한다."
곧, 의식이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세계는 전적으로 의식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식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세계가 비절대적이라는 결론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의 존재성 여부에 대해 일단은 보류하겠지만, 세계가 실질적으로 의식에 의존해야 할 만큼 존재성이 취약하거나 불완전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는 것인가? 근원적으로 세계와 차별화되는 순수의식의 존재성으로부터 세계의 의식 의존성 내지 상대성이 존재론적으로 자동 도출될 수 있는가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후설은 이렇게 말한다.
"의식과 실재 사이에는 넘기 힘든 간극이 있다. 후자는 음영 지고, 원칙적으로 단지 추정적인 지평 속에서 결코 절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단지 우연적이고 의식상대적인 존재이며, 전자는 하나의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원칙적으로 음영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 존재다."
후설의 주장에서 우리는 세계가 우연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은, 다만 이것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이 명증적이지 않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소여방식과 관련해 실재가 온전하게 명증적으로 주어지지 않음을 절대성의 개념과 대비시켜 상대적이고 우연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인식과 소여방식에 따라 후설은 후기에 이르러 아예 현상학의 중심과제를 '소여방식의 여하함에 따른 세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소여방식의 해명을 통해서 초월론적 의식과 세계가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의식에 대해 하나의 의미적 존재가 되고, 양자는 인식론적으로 불가분리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후설이 주장하는 의식의 절대성과 세계의 의식 의존성의 참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세계가 상대적이고 의식 의존적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에게 세계가 그렇게 주어지고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초월론적 의식이 세계와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지향성과 구성
판단중지를 통해 초월론적 의식을 드러냈다면, 이제 이 초월론적 의식은 배제된 세계의 존재 의미를 다시 해명해야 할 차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의식과 세계와의 연관성이 밝혀져야 한다. 여기서의 중점은 비세계적인 존재로서의 초월론적 의식이 이질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고, 또 자신의 영역을 넘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후설 현상학의 초기에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브렌타노에서 넘어온 의식의 '지향성' 개념이다.
지향성은 물리적 현상과는 구별되는 심리적 현상, 즉 의식의 고유한 특성으로, 모든 의식작용은 반드시 그 상관자로 어떤 대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의식할 때는 이에 상응하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하고, 또 이 대상은 반드시 의식작용과 연관을 맺는다.
지향성의 개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대상성이다. 어떻게 이 의식작용이 그 상관자인 대상과 연관을 맺고, 그 대상을 의식 내에 지닐 수 있는가는 다소 신비스럽기도 하다. 브렌타노는 대상이 의식과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적, 심리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두었지만, 후설은 어떻게 의식이 이 대상과 연관을 맺는가 하는 인식론적인 측면에까지 관심을 두었다.
우리가 만약 나무에 열린 사과를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전체의 사과를 절대로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과의 한 측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편적인 사과의 감각적 자료를 가지고 하나의 온전한 사과라고 지각한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감각 자료들이 분명 사과의 전부에 대한 감각 자료가 아닌, 단지 부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부분적인 것을 통해 어떻게 통일체로서의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후설은 이것이 지향적 체험 내지 작용 덕분이라고 본다. 지향적 의식의 특징은 대상성을 추구하면서 오직 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후설은 말한다. 즉 지향성은 단적으로 대상성을 향한 하나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감각 자료를 어떤 식으로든 대상성에 맞게 종합하고 해석해서 의식체험을 초월해 잇는 하나의 대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지향적 의식의 핵심 역할이다.
대상이란 기본적으로 감각적 소재를 초월한 일종의 의미 통일체이기 때문에, 통일체로서의 대상성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무규정적인 감각적 소재에 의미부여를 해 하나의 의미 있는 대상으로 해석하는 작용이 필요하다. 후설은 이러한 대상 산출적인 의미부여 작용을 '파악' 내지 '통각'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을 '노에시스 작용'으로, 그리고 이러한 노에시스 작용을 통해 형성된 의미의 통일체, 즉 지향적 대상을 '노에마'라고 부름으로써 지향적 체험의 구조를 더욱 구체화한다.
이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에 따른 지향적 의식의 대상 형성 작용을 후설은 '구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 활동의 주체가 바로 초월론적 의식이다. 그리고 후설은 초월론적 의식에 보다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부여해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월론적 주관성의 주된 역할은 구성작용을 통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른바 '지향적 대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지향적 대상이 의식의 상관자로서 초월론적 주관과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맺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연관관계는 자연적 태도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초월론적 환원을 통한 반성적 태도, 곧 현상학적인 태도 변경을 통해서만 드러남을 역설한다.
정리하자면, 세계는 지향적 체험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주어지고 파악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주관성에 의존한다. 이리하여 주관과 세계는 지향적인 연관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현상학적 관념론
의식과 세계와의 관계는 이제 지향적 관계로 밝혀졌다. 세계는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지향적 대상이다. 지향적 대상성이 주관성에 의해 형성된다는 조건 하에서, 후설의 현상학은 세계가 의식에 대해 하나의 현상 혹은 관념으로 존재한다는 이른바 관념론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후설 스스로도 현상학을 관념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후설은 자신의 관념론이 칸트의 관념론과는 다름을 강조한다. 칸트는 하나의 한계 개념으로 물자체를 인정하지만, 후설은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칸트의 관념론과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우리는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의미로서의 대상이 단지 하나의 현상이고, 참된 존재는 배후에 있다고 여기기 쉬우나, 후설의 현상학은 이러한 통념을 깬다. 초월론적 주관성이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한 지향적 대상은 어떤 실재의 표상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향적으로 의미 부여된 세계 밖에 또 다른 궁극적 실재의 영역은 없다. 모든 것은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의미의 영역에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현상학적 관념론은 실제 세계의 현실적 현존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현상학적 관념론은 실제 세계를 마치 자연적 사고와 실증 과학적 사고가 빠져있는 가상이라고 생각하듯이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적 관념론의 유일한 과제와 활동은 이 세계의 의미, 정확히는 이 속에서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전재하는 것으로서 간주되고, 또 참되게 정당하게 간주되는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발생적 현상과 모나드
후설의 철학에서 의식은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개별적 체험류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의식 주체를 출발점으로 하는 칸트 식의 의식관과는 다르다.
후설이 말하는 이 체험류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 체험이 하나의 시간성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이고, 더 나아가 의식에 의해 구성된 산물(노에마)조차 이러한 시간적 계기 속에 놓임으로써 일종의 역사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의 침전물 속에 남아 나의 습성과 역사를 이룬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식은 또 다른 대상 인식을 위한 기초로 작용하며, 기존에 형성된 다른 대상 형성물들과 더불어 나의 주변 세계를 내게 친숙한 대상들의 세계로 만든다.
이처럼 의식과 의식형성물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세계를 시간성과 역사성의 측면에서, 그리고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연관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후설의 '발생적 현상학'이다. 이 발생적 현상학과 대비되는 것이 '정적 현상학'이다. 이는 의식의 형식적, 보편적 구조에만 초점을 맞추어 시간성과 역사성의 계기보다는 의식의 보편적 기능과 활동에만 중점을 둔다. 즉, 발생적 현상학은 의식 작용보다는 의식의 형성물인 대상, 정확히는 대상성의 발생과 그 과정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대상에 대한 지식은 최초의 앎의 시점이 있고, 이로부터 이 지식은 지속적인 나의 소유물이 되는데, 이러한 대상적 지식의 발생과정을 추적해 그 의미 연관을 밝히는 것이 발생적 현상학의 과제이다.
우리의 의식이 형성한 대상물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침전되어 나의 습성과 인격의 바탕에 되고, 나의 역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구성된 세계 또한 형식적인 구조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내게 친숙한 하나의 역사 세계로, 이른바 '주위 세계'로 구성되는 것이다. 후설은 이렇게 습성과 역사성의 담지자로서의 구체적인 초월론적 주관성을 가리켜 완전한 구체성 속에서 이해된 자아라는 의미에서 라이프니츠의 용어를 따라 '모나드'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가 구성해낸 지향적 산물을 그 자체 안에 함유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해 지속적으로 세계 구성을 해나감으로써 자신을 보다 풍부하게 하는, 이른바 생성과 발전 속에 있는 역사적인 존재다.
"모나드는 현실적, 잠재적인 의식 삶 전체를 포괄한다."
이제 초월론적 주관성은 모나드로 이해된다. 곧 세계의 연관성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은 보다 깊어지고 구체화된다. 후설이 그의 후기에 이르러 단순히 '세계'라고 하지 않고, '생활세계'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세계는 이른바 구체적 통일성 혹은 보편적 구체성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세계의 성격을 '지평'이라는 개념을 갖고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