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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Aug 17. 2018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22

헬레니즘 철학 편 - 6. 갈라진 길 B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편은 헬레니즘 철학 편 - 6. 갈라진 길 A에서 이어지는 편입니다. 이 편을 보시기 전에 앞의 글을 먼저 읽고 오시면 좋습니다.




 교부시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들이 이뤄낸 철학적 성과가 아니다. 되려 교부시대의 진정한 의의는 기독교도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이룬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하나의 거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 필요성이란, 바로 조직의 통일이었다. 통일된 하나의 신념이 없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믿음 없는 자들의(철학자, 다른 종교인, 일반 사람들 등)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여러 사람들을 어떻게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세력들은 어느 세력이 다른 모든 세력을 지배할 수 있을만한 자격이 판명되기까지 오랜 투쟁을 계속하였다. 진정한 통일은 사상적인 통일이겠지만, 우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의 통일이었다. 우선 이 조직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면 다른 종류의 통일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신념, 신앙, 철학 등). 쉽게 말해 그들은 법률을 세우기 전에 우선 국가가 성립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런 통일을 위한 투쟁을 통해, 기독교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고, 또 발전했다. 기독교도들은 조직의 통일, 더 나아가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하나의 기준이 필요함을 느꼈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그들은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노력을 했는데, 첫째의 노력은 다분히 사도바울적인 호소였다. 사도바울은 자신 속에서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였고, 이 목소리는 곧 하나님의 목소리였으며,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목소리라고 여겼다. 사도바울은 이 내적인 경험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배격했으며, 이렇게 말했다. "유태인들은 표적을 연구하며, 희랍인들은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경험에 의한 호소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기준을 세워주기보다는 투쟁과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사도바울의 견해에 호소하는 것이 지나친 주관주의나 독단주의라 생각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하나는 유태교의 전통을 따르는 세력이었고, 하나는 희랍철학의 전통을 따르는 세력이었다. 율법에 따른 경건함을 무시한 은총에 대한 견해는 당연히 유태교 전통을 따르는 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합리적인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희랍철학 역시 비이성적인 내적 호소에 대해 반발을 샀음은 당연했다. 사도바울식의 호소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러한 반발에 대항하기에는 다소 불충분했던 것이다. 


 기준을 세우기 위한 기독교의 둘째 노력은 예수의 말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내적인 성령에 대한 호소가 불충분함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당연하게도 예수의 말을 권위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그간의 논쟁을 일시적으로나마 종결짓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역시 불충분했다.


 셋째의 노력은 신뢰성의 확보였다. 예수의 말이라고 구전된 것들과 쓰인 기록들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뢰성에 대한 문제가 생겨났는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어느 말이, 혹은 어느 문서가 가장 신뢰성이 있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를 다시 해결해야만 했다. 그들은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나름 세 가지의 표준을 사용했는데, 저술에 대한 저자가 확실한가? 저술과 기독교적 실천이 일치하는가? 유력한 교회 역시 그 저술에 대해 인정하는가? 였다. 그리고 이 표준을 통과한 저술들은 신약성경이라는 정전(正典)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 정전의 권위는 일시적으로나마 진정한 신앙의 기준을 제시하는 듯했다. 하지만 저술이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준을 잡을 때 쓰인 자료에만 호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넷째의 노력은 신약성경의 공식적인 해석을 위해서, 각 교단의 주교에게 호소하는 일이었다. 주교는 교단 내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박식하고 유력한 사람이었으며,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초기 기독교에서 주교가 가지는 비중은 곧 진리의 기준과도 어느 정도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의 노력은 주교회의를 통한 의견의 도합이었다. 아무리 박식한 주교들 일지라도, 주교들 간의 의견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주교에게만 호소하는 것은 여러 기독교 단체들을 통합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주교들의 회의를 통해서 의견을 통합하고자 했다. 이런 주교들 간의 총회의를 통해서 종교적인 판단기준에 관한 논쟁이 사실상 해결을 보게 된 것이다. 통합을 위한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교회의 이념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Henryk Siemiradzki, <디르케처럼 처형당한 기독교인>


 이처럼 교회는 어느 정도 통합을 이룬 듯했지만, 후에 두 가지의 위급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두 위기는 모두 로마 당국에 의한 기독교도들의 박해로 인해 생겨났다. 로마는 종교적인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는 자신 역시 신적으로 추앙받고자 하였고, 자신에게도 신을 존중하는 자세로 그에 합당한 희생물을 바치라고 명령한 것이다. 기독교도들에게 이러한 명령에의 복종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불충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했는데, 어떤 이들은 도피하여 몸을 보전하였고, 어떤 이들은 대항하여 순교하였고, 어떤 이들은 순간의 위기에 굴복하여 요구된 희생물들을 황제에게 바쳤다. 희생물을 바친 마지막 무리들은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이탈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후에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사라졌지만, 문제는 여기서 생겨났다. 희생물을 바치고 목숨을 부지했던 이탈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탈자들의 복귀 승인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다.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졌는데, 찬성파와 반대파였다. 한 기독교 지도자인 노바티아누스는 신앙의 경건성을 문제로 삼아 이들의 복귀를 거부하였으며, 로마의 주교였던 코르넬리우스는 이들의 복귀를 승인하고자 했다. 당시 주교인 코르넬리우스의 힘이 강성했던 탓에 노바티아누스는 파문당하고,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노바티아누스가 이단으로 된 이상 그에게 동조하는 것은 자신 역시 이단임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에 이탈자들의 복귀를 승인에 찬성하는 의견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성(聖) 키프리아누스가 특히 코르넬리우스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는데, 그의 의견은 이러했다. 교회란, 이미 완성된 혹은 구원된 사람들의 단체가 아니라 구원을 원하는 자들을 위한 방주(方舟)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곧 교회의 신성함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는데, 교회는 수시로 그 안에 들어오는 개인들과는 무관하게 신성한 실재(實在)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방주에 어떤 사람들이 타더라도 방주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안에 존재하는 개인들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들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것, 시간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앞서는 것이었다.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사건 후에 한 번의 사건이 또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일이었다. 이 역시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 사건이었는데, 앞선 사건보다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이번 이탈자들 중에는 성직자들도 끼어있었기 때문이며, 박해가 끝나자 다시 성직자의 자리로 복귀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역시 두 파로 의견이 나뉘었는데, 그들의 복귀를 승인하는 쪽과 승인하지 않는 쪽이었다. 복귀를 거부하는 쪽은 도나투스를 지도자로 삼는 강경파였으며, 복귀를 승인하는 쪽은 상대파라 하였다. 이번에도 교회의 효력은 성직자의 인격에 따라서 발휘됨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라는 상대파의 의견이 수용되어 강경파는 이단이 되었으며, 상대파는 확실한 권위를 잡고 정통파가 되었다. 두 번의 박해와 두 번의 이단 처단을 통해 정통파가 가지는 권위는 더욱 확고해졌으며 교회 자체의 권위 역시 두터워졌다. 교회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실재하는 것이다.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신성한 것이다. 교회는 어떤 시대건 신의 성스러움과 신의 은총의 보고(寶庫)가 된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 편 - 갈라진 길 C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다음 편에서는 드디어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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