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히도 야윈 어느 화가는, 거울 앞에 않아 힘겹게 붓을 들었다(그런데, 이 화가는 왜 이토록 야위게 된 것이지?)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위로 물감을 덧칠해나간다.
형형색색의 물감들은 어느덧 거울을 뒤덮기 시작한다. 거울 위로 만족스럽게 자신의 모습이 칠해져 간다. 그리고 더욱더 거칠어지는 붓놀림 속에(화가는 이미 정신이 나가 있다) 색들은 뒤엉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뭉개 진다. 만족스럽던 자신의 모습은 결국 사라지고,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비추던 거울도 사라져 버렸다. 결국 화가의 앞엔 한 명의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화가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군가! 당신은 나인가? 아닌가? 사실 그건 중요하지가 않지.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과 통하는 것을 하나, 하나 지워나가니 어떤가? 문을 닫아버리니 어떤가? 내가 말하고도 시적인 표현이군! 맘에 드나? 이것 참 기분이 썩 괜찮지 않은가! 이제야 만족을 하는가? 나는 만족을 하는데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군. 만족하지 못한다고? 이제 와서! 이것 참 아주 고약스럽군. 당신이 너무 고약스러워 한 사발 토악질을 해내고 싶군.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아니다. 사실 나는 너다. 날 이끌어 내준 것이 네가 아니냐? 날 드러내 준 것이 네가 아닌가! 네가 만든 너와의 이 대면은 기분이 꽤 좋군. 허나 이 기분 좋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금세 기분이 아주 역겨워지는군. 이건 농담인가? 아니면 진담인가? 나는 모른다. 날 이끌어 낸 네놈이 알겠지? 아니다 네가 안다는 것은, 나도 안다는 건가? 자 그럼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 두기로 하지. 네가 궁금해했던 주제로 바로 넘어가 볼까? 난 성미가 꽤 급하거든. 넌 죽고 싶나 살고 싶나? 죽고 싶다면, 나는 너다. 살고 싶다면, 나는 네가 아니다. 아니다. 나중에는 결국 나는 네가 된다. 나는 너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를 모르겠군. 좋다. 이제부터 널 일단 친구라고 해두지. 이보게나 친구, 날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왜 막상 마주하니,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는가? 당신의 표정은 지금 내 표정과 아주 딱 맞는군! 너무 재미있지만, 난 웃을 수가 없다. 이는 좀 아쉬운 부분이라고 해두지. 처음 거울을 보던 너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 이젠 혐오스러워졌나? 이보게나 친구, 당신은 참 변덕스럽게 느껴지는 군. 어떤가? 이대로 나와 계속 친구를 할 텐가, 아니면 날 깨버리고 그 잘난 거울을 다시 한번 세울 것인가? 날 불러냈으면 당신도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 지금은 내가 당신이니, 내가 말한 것은 당신이 말한 것인가? 누가 말해도 내가 말하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당신이 한 번 말을 했으면 좋겠군. 나도 이러고 있는 것이 꽤나 힘에 버거운 일이어서 말이야."
화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후로 그림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