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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Mar 26. 2018

오선비의 쓰레기 철학 강의 06

칸트


칸트



 칸트의 중요한 저서는 3세트가 있다. 비판 시리즈인데, 여기서의 비판은 남을 까는 그런 비판이 아니라, 하나하나 따져서 엄밀하게 정초 한다는 의미의 비판이다. 목록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이 세 저서의 핵심만 알아보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쉽게 도식화하면 진, 선, 미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자살을 했다고 보자, 바닥에는 사람이 쓰러져 있고, 피가 터져서 살점과 선홍빛 피가 흩어져 있다. 자 이런 상황을 진선미로 설명해보자. 사람은 무언가를 볼 때, 이 진선미의 관점으로 각각 분류해서 볼 수 있다. 


 먼저 진. 진은 이성을 말한다. 여기서의 이성은 과학적인 분석이라고 여겨도 좋다. 건물에서 뛰어내릴 때의 인간의 무게, 속도 등을 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 선은 도덕적, 윤리적인 것이다. 저 사람의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뛰어내린 사람은 왜 뛰어든 걸까? 무엇이 그 사람을 자살로 이끌었는가? 혹은 동정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미. 튀어있는 살점과 선홍빛 피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피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영화 킬빌을 보자. 칼 한 자루 들고 사람을 절단한다. 사실은 잔인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적인 연출에서는 사람 목이 잘려나가고 피가 튀는 장면이 아름답다. 우리는 그 모습이 멋있게 보이고, 영상미라고 말한다. 이처럼 모든 상황을 인간은 진선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자세히, 순수이성비판. 순수이성비판은 인간 이성의 절대적인 위치를 흔들어 놓는다. 가령, 어떤 여자가 긴 머리였다가 갑자기 싹둑 잘라서 단발로 했다. 우리는 그걸 보고 그냥 단발이다 라고 느끼지 않고 꼭 무슨 이유를 생각한다. 그리고 말한다. 남자 친구랑 헤어졌니? 무슨 일 있었니? 아니다 사실 그 여자는 그냥 자른 거다. 이처럼 이성은 오류를 범한다. 전통적으로 이성은 합리적이고 절대적이었고, 반면 오판을 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뒤집는 것이다. 이성이 오판을 하는 거라고, 그래서 이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확실하게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이성은 합리적인가? 하고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법정에 내세우는 것이다. 피고인도 이성이고, 원고인도 이성, 법관도 이성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의 진정한 실체, 칸트는 이를 '물자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으로는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령 책상이 있는데, 인간은 이 책상을 보고 갈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든 부분이 갈색이 아니다. 빛의 반사에 의해서 더 진한 갈색인 부분도 있고, 흰 부분도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고 이는 가시광선 하에서 갈색이다. 적외선이나 자외선에서는 다른 색으로 보인다. 태양이 가시광선이 아닌 다른 광선을 뿜었다면, 분명 갈색 책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이 아닌 개가 본다면? 잠자리가 본다면? 또 다른 색으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상 자체, 그러니까 어떤 물건 그 자체 본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물자체라고 부르자. 그리고 인간은 그 물자체를 알 수 없다.

 

 다음으로 실천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은, 다른 거 없다. 그냥 가언명령과 정언명령만 알고 가자. 예전 유행한 '정의란 무엇인가?' 책을 알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철도가 있고 철도 위에서 인부들이 철도 수리를 한다. 그런데 저 끝에서 기차가 달려온다. 물론 브레이크는 고장 난 상황이다. 여기서, 기차가 그대로 가면 인부 5명이 죽고, 다른 길로 빠지면 인부 2명이 죽는다. 나는 철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레버 앞에 있다. 나는 그대로 둬서 5명을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5명보다는 2명이 죽는 것이 나으니 레버를 옮길 것인가? 그럼 이제 학생들이 이 문제를 두고 싸운다. 그냥 둔다. 레버를 옮긴다. 5명보다는 2명 죽는 것이 나으니까. 아니면 원래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 그냥 두는 것이 운명이다. 모르겠다. 내가 그 인부들의 생명을 결정하는 레버를 돌리는 것이 부담스럽다 등등 다양한 의견으로 치고받고 싸운다. 사실 저자인 마이클 센델 교수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서로 싸우는 것을 바랄 뿐이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어떤 도덕적, 윤리적인 판단을 할 때는 그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언명령은 무엇인가? 조건이 달린 행동이다. 가령 내가 숙제를 하면 엄마가 게임하게 해주니까 숙제를 한다. 이건 가언명령이다. 그럼 정언명령은? 조건 없이 행하는 것이다. 길가다가 쓰러진 사람을 봤다. 우리는 신고를 한다. 왜 하지? 신고하면 고맙다고 사례금을 주니까? 그 사람이 사실은 삼성가의 사람이어서 도와주면 나한테 콩고물이 떨어지니까? 이런 쓰레기 같은 마음 이전에 쓰러진 사람을 보면 우리는 도와주고 본다. 쉽게 말해서 조건 없이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정언명령이다. 뉴스에서 용감한 시민을 인터뷰할 때도 자주 나온다. "어찌 그런 용기를 내셨나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칸트는 정언명령에 따른 하나의 경구를 말한다. "너의 행동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인 준칙이 되도록 행하라."

 

 예를 몇 개 더 든다. 길에 거지가 있다. 어떤 부자가(돈이 엄청 많다) 지나가다가 거지를 보고, 주머니에서 100만 원 수표를 꺼내서 휙 하고 던지고 간다. 그리고 한 사람은 그 거지처럼 돈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도 힘들지만 그 힘듦을 알기 때문에 고민 고민하다가 자기가 가진 천 원을 건넨다. 여기서 누가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한 것인가? 부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생각을 하고 판단해서 행동했다.

 

 마지막으로 예를 든다. 사람 두 명이 체스를 두는데 갑자기 원숭이가 와서 체스 말을 움직였다. 원숭이는 체스 말을 움직였다. 하지만 원숭이는 체스를 둔 것이 아니다. 원숭이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규칙을 알고서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윤리적인 행위이다. 하여간 모든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전의 생각과 고민인 것이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마이클 센델 교수가 그렇게도 학생들끼리 말싸움(?)을 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단력비판. 판단력비판은 미에 관한 물음인데, 이건 앞의 책 두 권을 통합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그 통합에 관해서는 어렵기 때문에 미에 대한 개념만 알고 가도록 하자. 이 책에서는 미(美)를 수동적인 미와 능동적인 미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우리가 미술관에 갔다 그리고 한 작품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대부분의 미술작품(특히 현대미술)은 친절하지가 않아서 내가 다가가야만 나에게 속삭여준다. 어찌 됐든 그 속의 미를 찾아내고 아름답다고 한다. 이는 능동적인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계곡에서 폭포를 본다. 너무 아름다워서 멍하니 쳐다봤다. 이는 밖에서 나에게로 훅 들어온 수동적인 아름다움이다. 이 수동적인 아름다움이 '숭고미'이다. 즉, 미를 느끼게끔 하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능동적인 미는 내가 다가가야만 하고, 수동적인 미는 나에게 다가온다. 보통은 능동적이 좋은 이미지, 수동적이 나쁜 이미지이지만, 이는 개념일 뿐, 일상적인 뉘앙스를 이 개념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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