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예쁨에 열광할 때,
홀로 평범을 쫓다.

(1) 그 모든 고민과 행복의 시작

by 우수고객


오랫동안 ‘이젠 괜찮다, 다 끝났다‘고 믿었던 생각이 다시금 나에게 근심이 되어 돌아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동안은 그 고민을, 그 두려움을 꺼낼 일이 별로 없었다.

자연히 조금씩 잊혀져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평범함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육아로 외부 활동이 적어지고 아이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많아서 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나의 희망사항이고 착각이었다.


아니, 이젠 나 혼자만이 겪고 이겨내면 되는 걱정과 두려움이 아닌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걱정거리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사실 그 걱정거리의 근원은 내가 내 존재를 인식하기 전부터, 나라는 존재가 아직 엄마의 뱃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때부터 지금껏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그 모든 고민과 행복의 시작


1984년 여름, 넷째 아기를 넉 달간 배에 품은 엄마는 갑작스러운 하혈에 놀라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기를 놓칠 수도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두 명의 아이들과 이제 갓 돌 지난 아기를 둔 엄마는 걱정을 하기도 쉽지 않은 한 달을 보냈으리라. 어쩌면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섯 달째, 의사는 태아가 자궁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놓칠 일은 없어졌지만 ‘전치태반’이니 오래 두면 위험해 7개월 차에 제왕절개로 출산하길 권고받았다. 하루하루의 무게가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긴 2달, 엄마는 걱정과 두려움, 기도로 그 시간을 버텼을 거다. 결국 그렇게, 대학병원에서 7개월 차에 제왕절개로 넷째 딸아이를 낳았다. 2.3kg의 작은 아기였다.


병원에 입원하고 노산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5일 만에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입원실로 왔다. 아기를 데리고 온 간호사는 대학 병원을 찾던 중 친구가 소개해줘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어느새 지인이 되었다.

출산 당시, 의사에게 ‘예쁜 공주님이예요.’라는 얘기를 듣고 아가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5일 동안 외할머니와 엄마의 친한 친구가 아기를 보고 갔지만, 아이가 작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별 다른 얘기는 없었다.

친한 간호사는 엄마에게 “아기가 (살면서) 많이 힘들거 같아요“라고 말하며 아이를 건냈다. 엄마의 시선은 아기로 향했고 처음 본 순간 ‘우리 아기 어떡하지, 여기서 뛰어 내려 같이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기의 얼굴은 다른 아기들과는 달리 눈과 눈 사이(미간)가 넓고 코가 태반에 눌려 다 자라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은 잠시 뿐, 아기의 쌔근쌔근 숨소리, 표정, 손가락.. 그 하나하나를 보니 다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중에 의학기술이 발달하면 이 정도는 괜찮을거란 생각을 했다. 아이의 생존 전략이 귀여움이라는 말이 이 때도 입증된 것이다.

2.3kg의 아기는 양수가 마르자 2.1kg까지 줄었다. 너무 작아 겉싸개로 감싸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무게가 적고 작았지만 생명력이 강해, 주는 분유를 모두 비울 정도로 남김 없이 잘 먹었다. 그 덕분에 인큐베이터엔 넣지 않기로 결정했고 출산 10일만에 퇴원했다.


아기는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엄마, 아빠, 오빠들은 물론, 18개월 언니도 동생을 질투하면서도 예뻐했다. 퇴원 후 한달이 지났을 무렵, 엄마는 막내 딸이 혹시나 유전적으로 이상이 있을까 걱정돼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또 한달이 지나 생후 2개월 쯤, 유전자 검사의 결과가 나왔다. ‘정상’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아기가 100일이 됐을 때, 유전자 검사 결과와 아기가 건강하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해 집안 잔치를 열었다.

IMG_8917.JPG 하루하루 폭풍 성장하던 꼬물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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