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행복한 유년시절과 죽음에 대한 첫 번째 질문
우리 가족들은 나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를 많이 사랑해줬다.
그렇게 2남 2녀의 막내로, 예쁨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빠는 어떤 경험이 있었던건지 '우리 막내보고 뭐라고 할거면 오지도마'라고 미리 어기장을 놓아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입막음을 해놨다고 한다.
나이차이가 15살, 12살 차이가 났던 오빠들은 마차 자기 자식인양 연년생인 언니와 나를 무등도 태워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살뜰히 육아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큰오빠가 나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돌면 일찍 사고친 젊은 아빠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애기 때라 그랬던 것일까. 동네 친구들도 나를 놀리거나 따돌리지 않았다.
나름 같이 무리지어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랑 빌라 옥상에서 대야에 물 받아놓고 물놀이하고 뒷동산에 올라가 친구 할아버지랑 메뚜기, 잠자리도 잡고 메뚜기도 구워 먹어 보고 놀이터에서 놀고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기억들만 가득하다.
유치원에 다녔을 때, 같은 반에 내가 좋아하던 남자 친구도 있었다.
소풍을 갈 때도 손을 잡고 함께, 유치원 옥상 텃밭에서도 함께, 그렇게 우린 좋은 친구였다.
유치원에서 생일 잔치를 하던 날, 자기가 친하거나 좋아하는 친구를 데리고 강당 앞에 서면 뽀뽀를 받는 이벤트를 했었는데 그때도 그 친구가 내 볼에 뽀뽀를 해줬다.
그 사진은 아직도 내 앨범에 고스란히 남아 행복한 추억을 연상케 한다.
그 친구도 날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자주 같이 놀았다.
내가 이사를 가서 그 유치원에 안 다닐때도 그 친구 엄마와 차를 타고 우리 집에 놀러와줬다.
행복하기만 했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죽음'이라는 명제가 주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엄마는 곧 학교를 갈 나이가 되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걸 걱정하셨는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엄마는 분명 많은 수소문과 고민 끝에 나를 그 곳으로 데려간 것이리라.
그 곳은 지금은 사라진 백병원, 당시 유명했던 성형외과전문의 백세민 선생님께 나를 보여주셨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한 1주일쯤 그 곳에 입원을 했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피검사, 엑스레이, CT 촬영 등 온갖 검사가 진행됐다.
내가 바늘 공포증이 생긴 것도 바로 이때다.
모든 병원 검사가 그렇듯이 항상 바늘이 함께였다.
나는 너무 많은 횟수를 팔에서 체혈해 나중엔 손, 발 다양한 곳에서 체혈을 했다.
어떤 때는 똑같은 곳을 3-4번 찌를 때도 있었다.
당시 간호사 선생님은 내 혈관이 얇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방접종을 해도 한 번도 울지 않는 아이였는데, 이후 지금까지 바늘만 보면 항상 '한번에 뽑아주세요'라고 얘기하며 방어부터 하고 본다.
그 많은 검사 후, 백선생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해 보이려면 두개골을 열고 내 미간 사이에 뼈를 깍아내고 깍아낸 뼈만큼 귀쪽에 연골을 넣어야한다고 했다고 한다. 생존률도 30%,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엄마는 백선생님 말고도 다른 전공의선생님꼐 여쭤봤다고 한다.
선생님이 엄마의 입장이면 어떻게 하셨을거 같냐고..
그 의사 선생님께서는 자기 같으면 하지 않을거라 하셨다고 한다.
아무 것도 모르던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겨났던 건지 엄마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 자식을 키우고 있는 나는...... 절대 불가능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바로 짐을 쌌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밤에 내 얘기를 듣고 엄마가 갑자기 짐을 싸 집으로 왔던 기억.
나는 행복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