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안녕하세요, 와니입니다. 이번주와 다음 주의 주제는 <내 장례식에서 대접하고픈 음식>입니다.
여러분은 다음 생에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로 태어나야 한다면 어떤 생물이 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꾸준히 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편인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개봉하기 전부터요.) 그건 생물이 아니라서 논외일까요? 아니면 이번 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물인 아르마딜로나 개미핥기가 되고 싶네요. 개미를 먹는 삶도 꽤 괜찮을 것 같아요. 하지만 장례식은 다음 생의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치러집니다. 이번 생에 알았던 사람들의 손으로 그들 자신을 위해서요. 그러면 저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요. 보내드릴 글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진 출처: 영화 <퍼스트 카우>(켈리 라이카트, 2019)
죽어서는 퇴비가 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돌멩이나 개미핥기가 되고 싶지만, 남은 몸은 퇴비가 되어 뭔가 쓸모가 있는 것이 되는 편이 좋겠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후로부터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몇 년 전에 한 TED 강연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강연자는 친환경적이고 새로운 시신 처리 방식으로 시신을 빨리 썩는 물질로 가득한 기계에 넣고 퇴비로 만드는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울면서 조용히 기뻐했다. 저 기계가 정말 쓰이게 된다면 나도 기꺼이 저 속에 들어가겠어! 시신을 매장할 땅이 부족한 곳의 죽은 사람들은 세로로 된 관에 들어가 묻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졌다. 화장의 탄소 발자국을 생각하면 몸을 태우는 일은 별로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납골당도 관도 너무 좁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억울하다.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트집 잡힐지도 모르지만.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에서 나온 것처럼 죽으면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도 없고, 바로 다음 생으로 직행하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퇴비가 되고 싶다. 원래의 몸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멀리멀리 퍼질 수 있다는 것의 가능성은 내 삶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도 사라지는 것을 기리는 절차는 무척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아직 죽지 않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미련과 죽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쩔쩔매는 마음이 나를 그렇게 이끄는 걸지도 모른다. 죽음도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들도 두렵지 않다. 다만 나는 그저 죽은 이들이 더는 늙지 않는 고정된 이미지가 된다는 점이 무섭다. 어떤 나이 이후에 그들이 어떤 모습을 했을지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인지, 죽을 때 아무것도 남기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인데도 죽음의 의식은 필요하다고 느낀다. 죽음 이후 사람의 얼굴은 그 시점에 멈출지도 모르지만, 의식을 통해서라면 그 이미지가 여러 사람의 인식 속에서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아마 간접적인 노출의 총량을 가늠했을 때 죽음의 순간을 본 것이 장례식을 본 것보다 많았을지도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장면들은 죽음 그 자체보다 장례에 관한 것이다. 한두 가지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러브 액츄얼리>에서 다니엘(리암 니슨 역)의 아내가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고른 노래는 베이 시티 롤러스의 ‘Bye Bye Baby’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장면만은 무척 멋지다고 생각해 왔다.
2.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이 영향을 미칠 장례식 장면은 아마도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죽은 동성 파트너를 위해 매튜(존 해나 역)가 W.H. 오덴의 시를 읊는 장면일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장면이 보여주는 이제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애정은 대체될 수 없다.
나에게도 내 죽음 이후가 어떠했으면 좋을지에 대한 막연한 생각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방식도 있다. 무슨 노래를 틀어줬으면 좋겠어, 어떤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같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생겨서 죽는다고 한다면 그런 구체적인 소망들은 이뤄지지 않을 터임을 알고 있다. 경제적 독립도 없고 가진 것도 별로 없고(내 책들!) 계획도 딱히 없는 지금 죽는다면 한국의 평범한 죽음 이후와 같을 테다. 누군가는 염을 하고, 누군가는 찾아오고, 가족들은 무슨 사진을 고를지 고민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장례식장 음식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 내가 내 장례식에 가타부타할 수 있을 정도의 결정권을 갖게 된다면, 장례식에서 무슨 음식을 내고 싶어?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먹는 육개장은 원하지 않는다고, 죽고 나서도 내 이름으로 쓰레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게 싫다고 준하와 의견 일치를 보고 나서 나온 질문이었다. 역시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할까? 그렇지만 나는 뭐든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라 인생 최고의 음식으로 꼽을 만한 것이 없었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식성은 모두 달라서 뭘 내놓아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타코 샐러드, 두유 컵케이크,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준비하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도 오는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지 않을 만한 음식의 기준이란 너무 높아 보였다. 이 질문이 초여름에 시작되어 겨울이 올 때까지 이어졌는데, 고민을 거듭할 때마다 정말 멋진 식사를 대접해야지, 같은 거창한 아이디어는 사라져 갔다.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채소 스틱을 먹고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어. 편의점에서 파는 채소 스틱 컵에 들어있는 정도의 생채소를 먹고 집에들 가버려. 그 정도면 아무도 귀찮지 않고 적당하지 않은가. 웬만하면 먹을 채소도 각자 가져와.
내가 바라는 내 장례식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시신을 퇴비화하는 그 획기적인 기계가 내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상용화된다면, 죽은 나는 무사히 퇴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퇴비화의 날에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퇴비화 기계 앞에 모여서 맛있는 소스와 함께 놓인 채소 스틱을 먹을 것이다. 그때까지 땅에서 자란 생채소가 남아 있을까? 아무튼 장례식에서 빨간 음식을 먹는 일은 액운을 막는 의미라니까 당근을 먹어 줘. 만약 채소가 도저히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진다면 무엇이든 좋으니까 어쨌든 섬유질이 있는 무언가를 먹어주길.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다. 내 욕을 해도 상관없다. 내 의지를 거스르고 나를 화장하지만 않는다면… 후쿠이 료의 앨범 한 장을 틀어두는 짧은 시간 후에 나는 유기물들 사이에서 분해되기 위해 기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형체도 없어진 채로 어딘가로 퍼질 수 있는 형태가 될 것이다. 한 곳에 멈춰있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채소 스틱을 먹는 동안 사람들이 내가 어떤 식물을 기르게 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청경채도 좋고 무도 좋아. 자작나무도 좋고 이름 없는 나무도 좋아. 아니면 정말 땅바닥을 구르다가 굳어서 돌멩이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니게 되면 아주 시간이 오래 걸려도 괜찮을 것이다. 생채소를 먹으며 내가 기를 식물들을 기려준 좋은 사람들은 배가 부르지는 못한 채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죽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 풍경에 안도한다. 그때가 되면 집이 없고 채소 스틱을 먹지 못해도 억울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견딜 수 있거나 선택권이 없는 날에 나는 내가 보지 못했고 장례식이 열리지 않았거나 누군가가 충분히 함께할 수 없었던 죽음들에 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사진이 없는 사람들.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들. 인사를 건네거나 받을 시간이 없어서 ‘어어어?’ 하다 보니 이름을 부르기 어렵게 된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한 사람의 몫보다 큰 뭉뚱그려진 개념에 그칠 뿐이다. 그들의 죽음을 생각한다고 해도 정작 나는 내 문제들에 버거워하느라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비겁함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기도 한다. 하지만 특정되지 않는 죽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동시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 방법을 배웠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퍼스트 카우>는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개가 산책을 나왔다가 흙 속에서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뼈를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웬 뼈지? 관객들은 사람의 흔적이 주는 학습된 두려움 말고는 어떤 감정도 가지지 못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욕망과 목표가 있었다. 가진 물건도 있었다. 영화가 흘러가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추적하기 때문에 그들을 잘 알게 된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가던 길에 지쳐 잠시 쉬고자 그루터기 옆에 누웠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곳에 계속 있게 되었다. 화폐 대신 쓰던 조개껍질들도 전부 부서져 사라지고, 현대인이 신고 입는 것보다 몇 배는 튼튼했을 가죽 장화도 코듀로이 바지도 썩어 없어지고 가지런한 뼈들만 남았다. 그래도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가지런한 뼈를 이전과는 다르게 본다.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짧은 풀들(한때 울창한 숲이었던 곳은 이제 낮은 식물만 자라는 땅이 되었다.) 사이에도 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무심코 믿게 된다. 자연히 죽음은 절절맬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미지를 눈앞에 떠올리는 것 말고는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 할지 아직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 퇴비 기계가 나를 받아줄 때까지 계속 그 방법을 찾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