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리베카 솔닛의 책 『걷기의 인문학』은 제목처럼 걷기에 관한 저자 본인의 경험과 인문학에서 걷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탐구해 내는 책이다. 자연철학 시대부터 몇백 년 내 범위의 사유까지 아주 긴 시간의 걷기와 철학 하기를 다루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19세기 등장했다는 한 단어였다. 다음은 해당 부분의 일부이다. “벤야민에게 도시는 매혹적 구성물이었다. 연대기가 깔끔한 직선의 시간적 구성물이었다면, 도시는 배회하지 않고서는 지각할 수 없는 공간적 구성물이었다. …군중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경험에 처음 나타난 듯했고, 플라뇌르는 모종의 새로운 인물형, 이런 소외 상태에서 편하게 지내는 인물형의 대표자였다.” 플라뇌르. 프랑스어로 ‘산책자’라는 뜻의 남성명사이다. (이 글을 읽은 와니가 여성명사로는 플라뇌즈라고 알려주었다.) 감히 말하자면, 나와 꽤 닮아있지 않은가.
나는 자주 도시를 관찰하고 탐험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에게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이 도시는 낯선 땅이다. 발붙여 사는 도시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매 학기 정해진 거처 없이 떠돈다는 건, 벽돌집을 지은 아기돼지 옆에 텐트를 치고 자는 기분이랄까. 누추한 텐트에 들어가면 바람 소리가 귀를 에고 바닥에 누우면 등이 배긴다. 내가 나가 있는 새 태풍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도 같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산책자랑 텐트가 무슨 상관이냐고? 도시를 배회하고 그 구석구석을 관찰하다 보면, 내가 날아갈 것만 같은 텐트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그러니까 말했듯이 나는 산책자인 거다. 똑같이 지방에서 온 친구들이라면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을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와니는 도시 산책에 자주 어울려 주었다.
우리는 도심으로 나간다. 도심 한복판에서 행인들 사이에 섞어 들며 나의 이방인-됨을 조금 잊을 수 있다. 체감한 적 없다면, 한 번쯤 찬 바람 부는 날 광화문 광장에 나가 유심히 쳐다보길. 겉옷 주머니에 손 꽂고 차가운 표정으로 척척 걸어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거긴 누구의 목적지도 아니다. 어디로 향하는 걸까? 적어도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가 익명의 배회자 아니겠는가. 나와 다름없이. 물론 매일 저녁 근원지에 돌아가는 사람들과 나는 같지 않을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내 방은 언제든 나를 쫓아낼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평생 부엌이 없는 방만을 떠돌아다닐 수는 없다. 거처 앞에 괄호치고 임시. (임시) 거처. 부엌의 부재란 그런 뜻이니까. 가장 무겁고 크고 성가시고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머무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들은 부엌에서 잠을 잔다. 부모님과 살던 집에 두고 온 냄비, 나무 도마처럼. (때로는 알배추, 냉장 햄, 파스타 소스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식기가 가득한 그릇 백화점에 들어갔다. 식기를 구경하다 보면 파란 이삿짐 박스에 눈앞의 그릇이 들어가는 상상을 하게 된다. 다음 거처를 향해 배송되고, 때가 되면 다시 배송되고, 내 옷장이나 책상 밑에 처박혀 있다가 가끔 먼지를 벗고, 언젠가 다시 박스 안에 들어가리라. 나는 그릇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습관처럼 학기말까지 몇 달이나 더 현재의 방에 머무를 수 있는지 셈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방인인 것일까.
올해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도마와 칼을 샀다. 채소를 먹기 좋게 잘라서 부족한 식이섬유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싸고 작고 가벼운 것들이었지만 오이를 자르기엔 충분했다. 시원한 오이 스틱을 아삭아삭 씹었다. 떨어지면 다시 사와서 채워두었다. 여전히 기숙사가 내 집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적응할 수 있었다.
그래. 오이를 써는 건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도시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다가 서울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초여름의 버스 안은 시원하지만 뜨거워서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잤다. 비몽사몽 뜬 눈에 언뜻 서울이 보였다. 그때,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무척 편안해져서 다시 잠에 빠졌다. 그때 그 버스를 떠올리면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부엌이 없는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다고 믿기로 했다.
이번 글은, 시작에 그러했듯 『걷기의 인문학』을 인용하며 마칠까 한다. (실은 아렌트의 말이지만) “집을 안락한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 집을 그저 자고 먹고 일하는 곳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집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것이듯, 도시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방법은 아무 정처 없이, 아무 목적 없이 도시를 마냥 걸어 다니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 글처럼, 나에게 도시에 마음을 붙이는 것은 부엌 있는 방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준하입니다. 벌써 여섯 번째 주제로 찾아뵙게 되었네요. 부족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고 이렇게 마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번 글은, 저희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로 한 이유가 된 삶의 경험 가장 중심에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부엌은 커녕 신발장도 없는 방으로 매일 돌아가는, 도시를 떠도는 시골쥐의 삶 같은 것이요. 하지만 와니가 말했듯이 (여전히 부엌은 없지만) 뒤뚱뒤뚱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합니다. 매일 조금씩 괜찮아지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삶의 요령이 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썩 즐겁지 않은 날에도 일어서서 밖에 나가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음 주가 벌써 저희가 준비한 마지막 주제입니다. 아침밥이 하루를 여는 식사라면, 내 삶의 끄트머리에서 대접하는 식사도 있는 법이지요. 네, 바로 내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대접하고 싶은 식사에 대해 쓰기로 했어요. 여러분은 상상해본 적 있으신가요? 사람마다 꿈꾸는 일요일 아침식사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보시기를 바라며 오늘은 이만 마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