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안녕하세요, 와니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이야기해 볼 주제는 <부엌 없는 삶>입니다. 어쩌다 보니 저도 준하도 터무니없이 비싼 월세를 피해 도망을 다니며 부엌이 없는 방들을 따라 도시에 살아 보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부엌이 없다는 것은 생활의 큰 부분이 전과 전혀 다른 형태로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생활은 때때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비틀거림 사이에서 초보 발레리나들처럼 언젠가 마침내 바닥에 발을 대고 서기 위해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채인선 글, 이억배 그림, 재미마주, 1998
소설가 E.M. 포스터가 자신의 책 <전망 좋은 방>에 50년이 흐른 뒤 덧붙인 글의 제목은 <방 없는 전망>이다. 볕 좋은 피렌체에 여행을 갔다가 사람들이 우글우글한데도 살인이 일어나는 광장에서 돌연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스이니 심보가 여간 고약하거나 사랑보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두 사람의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게 인지상정인 책에서 말이다. 방이 없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런데 포스터의 상상 속에서 주인공인 루시와 조지는 50년의 공백 사이에 정말로 집을 잃는다. 결말에서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신혼부부가 되지만, 소설이 쓰인 후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작가가 겪은 현실 세계의 전망은 장미꽃 만발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더욱이 당연하게도 E.M. 포스터는 그런 현실이 인물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 쓴다. 그들 앞에 주어진 것은 젊은 시절 밖을 내다보던 전망 좋은 방(그리고 탁 트인 전망)이 아니라, 결혼 후의 삶에 찾아온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잃어버린 방이다. 그들에게는 방이 없다. 영국을 뒤엎었던 공습 때문인지,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야 하는 현실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 변화 중에서 과거에 보았던 어떤 전망은 한결같고, 다른 어떤 경험들은 돌이킬 수 없이 변했음을 그들은 발견한다.
굳이 웬 소설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결정적인 이유로는 지금 나도 방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니고, 생계를 크게 위협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나만의 요동치는 생활이 존재하는 까닭에서 소설 속에서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던 인물들이 현실 세계의 사건들에 부딪히며 집을 잃어버린 것에 나도 모르게 짠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에 방이 없다. 방 없음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전망 좋은 방>의 두 사람이 폭격으로 집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통해 희망을 놓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나는 몇 년간 분기별로 기숙사에서 기숙사로, 나와 같은 처지의 모르는 사람과 쓰는 모르는 방으로 들고나기 위해 택배를 붙이는 생활에 지쳐버렸다. 그리고 내 머리 위 상태 창에 쓰여 있을 것만 같은 ‘정주지 없음’이라는 상태에도 지겨워져 버렸다. 태어나서 처음 살게 된 대도시의 길거리에서 이제부터 침대와 옷장만 있는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매번 나 자신을 갉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속의 파임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이 기나긴 주거 불안은 부엌만 있다면 해결될 것이라고 어느새 믿게 된 것이다. 따뜻한 밥을 만들 수 있다면, 나를 파먹는 대신 그 밥을 먹으면 된다고.
부엌만 있다면. 지금처럼이라도 좋으니까, 방에 언제든 쓸 수 있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있다면. 혼자 있는 기숙사 방에서 내일 들어야 하는 강의를 생각하며 기가 죽는 날마다 상상이 점점 발전했다. 공용 정수기의 애매하게 뜨거운 물 대신 주전자 한가득 물을 담아 끓여서 보리차를 만들고 싶다. 아침에 끓인 보리차를 보온병에 담아서 하루를 나고 싶다. 먹고 남은 밥을 냉동해 두었다가 해동해서 뜨거운 차에 말아먹고 싶다. 양파나 감자를 한 바구니 사고 싶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자리에서 일어나 게맛살을 넣은 두꺼운 스페니쉬오믈렛을 만들어 먹고 싶다. 편의점에 가거나 식권을 뽑아 밥을 먹으면서… 냉동 채소와 파스타 소스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서… 짐이 많으면 곤란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조리도구는 한정적이고 공용 냉장고를 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재료는 그 폭이 더욱 좁아진다. 부엌이 있다면 특별한 저녁에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배달 음식이 아니라 각자의 요리를 뽐내며 예산 내에서 살 수 있는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고 일요일 아침에는 카페오레에 프렌치토스트를 먹고 싶다. 배추를 잔뜩 썰어 넣은 전골을 만들어서 먹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끓여서 카레로 만들고 싶다. 금방 무르는 과일을 먹다가 무르면 무른 대로 설탕을 때려 넣고 조림을 만들고 싶다. 쓸 일이 있는 요리책을 사고 다가오는 식사를 계획하고 싶다.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은 오전에는 룸메이트의 기척을 애써 무시하고 누워서 ‘포근한 비건 수프 레시피 아홉 가지’나 ‘줄리아 차일드의 30분 저녁 메뉴 만들기’ 같은 영상을 찾아보곤 했다. 따라 할 수는 없지만… 아는 건 많고 할 수 있는 건 없는 사람의 상상만큼 커다란 것도 없다.
온전히 나만의 부엌에 대한 상상은 늘 머릿속 한구석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그 공간의 이미지를 가장 잘 담는다고 생각한 요리가 초여름 이태원에 있었다. 준하와 나는 비정기적인 행사로서 ‘간 적 없는 동네 탐방의 날’을 종종 만들고 있는데, 중간시험이 끝나고 둘 다 큰 과제의 제출일이 임박해 있었던 우리는 그날 더위에 약간 땀을 흘리면서도 우리의 일상적 공간과 전혀 다른(그러니까 가보지 못했기에 처음 방문하는) 공간을 찾아 이태원에 다다랐다. 과제물은 제쳐두고 해외 식재료를 파는 식료품점인 ‘포린 푸드 마트’에서 홍차 티백이나 향신료들을 지나치게 오래 살펴보며 ‘집에서 스파이스부터 볶는 카레’의 맛은 어떨지 아무래도 부정확할 예상을 한 후에, 한참을 걸어 천장이 매우 높은 카페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소논문을 쓰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씨처럼 결연한 얼굴로 길을 걷기 시작하는 대신 우리는 비슷하게 결연한 얼굴로 지도 앱을 켜 근방의 맛집 리스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고픔 속의 결연함 끝에(배고픈 사람은 한참을 결연할 수 있다) 한 교자 전문점에 도달했다.
오늘 할 일은 어차피 끝이야… 저녁 시간 특유의 성취감보다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큰 상태로 좁은 식당에 앉았지만, 곧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차가운 맥주와 교자가 주문하자마자 등장했기 때문이다. 길쭉한 타원형 접시에 담긴, 전분 갠 물로 나란히 연결된 구운 교자. 날개라고 부르는 그 연결 지점은 물렁한 교자를 먹을 때 딱 적당한 바삭함의 경험을 제공한다. 각자의 몸과 가까운 쪽에서부터 한 조각씩 교자를 뜯어냈다. 부서지는 날개는 입안에서 금방 사라지지만 교자는 뜨겁고 짭짤했다. 이거 만들어 본 적 있어? 아니.. 없어.. 재료는 간단한데. 그러게. 결국은 만두가 맛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중에 직접 해보고 싶다. 부엌이 생기면… 나는 아직 1인분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1인분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뜨겁고 짭짤하고 마늘 맛이 나는 교자를 먹고 나서 우리는 각자의 침대와 옷장과 책상만 있고 부엌은 없는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실험적인 기분이 들어도 당분간은 날개 교자를 만들어 볼 수 없었다. 다만 날개 교자가 있는 전망에 대한 낙관적 상상만이 가능하겠지…
언젠가 내가 나의 부엌을 가지게 되는 날이 꼭 상상과 같으리라는 짐작은 하지 않는다. 뜨거운 물이 마시기 싫어서 보온병에 든 보리차 대신 차가운 루이보스를 물처럼 마시게 될 수도 있고, 야금야금 쓰는 게 싫어서 비싼 향신료를 사지 않을지도 모르고, 1구짜리 인덕션만 있는 좁은 주방에서 마지못해 원 팬 파스타만 먹고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로 스파이스부터 만드는 카레를 잘하게 될지도 모르고, 날개 달린 교자를 만들다가 태우는 일이 자꾸 일어나면 전처럼 이태원에 가서 사 먹어야 할 테다. 아니면 날개 달린 교자를 만드는 일은 싹 잊을지도 모른다. E.M. 포스터는 ‘방 없는 전망’을 마치며 이렇게 썼다. <전망 좋은 방>의 남자 주인공인 조지는 2차 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풀려난 후 아내 루시를 처음 만났던 피렌체를 다시 찾는다. 젊은 시절과 다르게 피렌체는 변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펜션의 ‘전망 좋은 방’은 찾을 수 없었다. 조지는 전망은 변하지 않았지만 방은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전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망이 있으니 방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함께 기뻐한다. 밖을 내다보는 것. 멀리 내다보는 것. 그곳에 있는 나의 생활이 꼭 예상에 들어맞을 리는 없지만, 만약 부엌이 있는 어느 순간의 삶이 나를 서서히 무르게 하지 않는 조건이 된다고 믿는다면 나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졌다. 지금 즉석밥의 포장을 뜨거워하며 벗기는 동안 남긴 상상들이 그때 나의 생활을 지지하는 전망이 되어 줄 것이라고. 물론 지금의 부엌 없는 상태에서 내 마음에 남는 자국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은 아이로서 그 자국들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터가 주장한 것처럼 전망을 계속 가지는 일이 훌륭하다면, 자국들 사이로 전분을 갠 물을 부어 날개를 잇는 일도 영 쓸모없지는 않아 보인다. 나는 그 속에서 방을 찾는다. 일어나서 맥주를 꺼내러 냉장고로 향하고 싶어 진다.
*(본 글에 있는 소설 <전망 좋은 방>에 관한 모든 내용은 전망 좋은 방,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저, 고영아 역, 열린책들, 2009.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