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아가씨다운 식사가 하고 싶다. 어디서든 아가씨답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행복도 미소를 띤 다른 사람들의 얼굴처럼 어디서든 유효하다고 믿고 싶어서이다. 물론 (준하가 첫 번째 글에서 말한 것처럼) ‘아가씨다움’은 물질적인 특성이 아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금전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귀족 영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가씨답고 싶다는 건 쌀 한술을 입에 집어넣는 순간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고 싶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그저 마음가짐이다.
https://youtu.be/MNafvdFmcCo?si=vsfZvX71amjHLAoo
‘행복을 비웃지 마라’. 어느 날 아침에 인터넷을 떠돌던 오래된 광고 영상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같은 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일본 음료 회사인 산토리에서 2010년에 만든 우롱차 광고다. 대만 배우 장첸이 길거리 노점처럼 보이는 곳에서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찍는다. 아무 대사도 없이 그저 음식을 먹을 뿐인 배우는 마지막 몇 초를 남기고 카메라(그리고 광고를 보는 우리)와 눈이 마주친다. 마치 음식을 먹는 자신을 몰래 보고 있던 사람과 실제로 눈이 마주친 것처럼 힐끔 눈동자를 굴린다. 그때 그의 얼굴 위에 크게 떠오르는 문장 하나가 ‘행복을 비웃지 마라’다. 일본어로 읽으면, 반말로 쓰인 이 문장은 좀 더 공격적으로 들린다. 상대의 존재도 모를 정도로 눈앞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에 푹 빠진 사람을 함부로 훔쳐보던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꾸짖는 듯 느껴진다. 아마 그렇게 대뜸 비웃음의 누명을 쓴 시청자들은 이 광고를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을 테다. 어쩜 저렇게 맛나게 먹나, 거침없는 배우의 모습에 매료되어 한참 본 것뿐인데 혼이 나니 나도 울컥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문장을 이해했다. 나도 누군가가 나의 식사를 빤히 본다면 그렇게 쏘아붙일지도 모른다. 이보세요! 이건 지금 나와 음식 간의 사적인 시간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영상 속 장첸의 모습처럼 정신도 잃고 휴대전화 알림도 잊고 딱 적당한 온도의 식사를 하는 날은 생각보다 드물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림보다 늘 많다. 삼각김밥을 입에 집어넣으며 부엌의 부재나 타향살이나 출근 시간대의 교통혼잡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먹는 일은 나와 음식 둘보다 많은, 공사를 넘나드는 관계들을 포함한다. 탄소 배출이 많이 되는 음식을 먹을 때 조용히 죄책감을 계산하는 일은 선악의 경계가 전례 없이 불분명한 현대를 사는 인간종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처음 보는 메뉴가 무슨 맛인지 가게 주인에게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어느 가게가 더 저렴한 김밥을 파는지, 안주가 맛있는 그 술집 오늘은 열었을까, 언젠가 좋은 식당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오른 월세에 버티지 못하고 전부 망해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나와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둘러싼 불안들도 큰 고민들을 밀어내며 끼어든다. 그런 생각들에 떠밀려, 식사할 준비가 되었던 이는 티 나지 않게 조금 지친다. 사적인 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미 잔뜩 방해받는 중이었어…하지만 지구민이자 도시민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남으려 하다 보면 자주 가는 카페의 카페라테 가격이 왜 기어이 오르고 말았는지 자연히 궁금하다. 먹는 시간 중에 사적인 시간은 없다. 먹기 위해서는 이런 생각들을 함께 삼켜야 한다. 그 맛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닭날개를 뜯는 장첸의 모습은 이런 관계들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몰두해서 음식을 먹는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지만, 이미지는 그 자체만은 아니다. 광고 제품인 우롱차의 노출은 얼마나 되는지, 일본 기업인 산토리가 상품 판매를 위해 타국인의 생활을 낭만적인 이국 문화로 그리는 방식은 어떠한지, 그를 위해 자국 광고에 자국인이 아니라 대만인 배우를 기용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긍정/부정과 상관없이 수많은 관계들이 짧은 식사 장면 안에 포함되어 있다. ‘행복을 비웃지 마라’라는 문장 역시, ‘맛있는 걸 먹을 때만큼은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사람들의 욕망을 쿡 찌르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문장이다. 나는 왜 그 문장에 그렇게 동요했을까? 아가씨다운 식사를 하고 싶다는 내 일상의 욕망이 간파당했고, 그로 인해 광고의 의미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행복을 비웃지 마!’라는 문장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 장첸의 모습이 더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식사에 따라오는 많은 관계들을 함께 꿀꺽 삼키면서도 여전히 부족함 없는 날들이 모두에게 분명 있었음을 우리 자신도 잘 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적당한 온도의 식사를 하는 날은 늘 어림보다 많다. 작은 잔에 나오는 수입 맥주를 주문하고 후회하지 않는 저녁이나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읽어낼 수 있는 점심. 초콜릿과 크래커와 사과를 가방에 싸들고 나와 비싼 파스타를 사 먹는 사람들이 가득한 카페 옆의 노상에서 먹는 브런치. 토스터도 오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오븐이나 토스터에 구워 먹어야 맛있다는 딸기맛 팝타르트 한 박스를 들고 집에 가는 길. 지나치게 선택지가 많은 카레가게. 단숨에 인기가 많아져 줄 서서 먹는 식당. 좁은 부엌에서 먹는 아침. 부엌이 전혀 없는 방에서 먹는 아침. 한겨울에 유서 깊은 평양냉면집에 가서 들이키는 한 그릇에 만 오천원인 냉면. 준하와 나는 그날 먹은 냉면이 너무 맛있어서 한파가 찾아온 다음 날에도 손가락만 빨며 찬 국수를 추억했다. 어떨 때는 값이 제법 나가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영 허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쏘아보고 싶어 지지만, 어떨 때에는 접시에 든 것으로 충분하다. 주어진 것을 제대로 씹어먹으면 따라오는 골치 아픈 문제들도 조금씩 소화할 수 있게 된다. 잘 먹는 일만큼 노력이 필요한 일도 없다.
오늘은 아가씨다운 식사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은 드물게 찾아온다. 어떤 날에는 입을 대기도 전부터 즐거우리라는 걸 알고 다른 날에는 다 먹어놓고도 괴로워한다. 가능한 날에는 힘껏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내일의 다짐을 한다. 새로 간 김밥천국 지점이 다른 곳보다 어쩐지 맛없을 때, 가끔은 좌절하고 말겠지만. 동네 식당의 여는 시간이 적힌 마음속의 지도는 점점 커질 것이고, 돌연 폐업한 사랑하는 식당들의 이름은 붉은 줄이 그어지는 대신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화려하게 꾸며질 테다.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물을 것이다. 사장님 지금 뭐 하실까. 그 메뉴 나한테 전수해 주고 가시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런 피할 수 없는 씁쓸함과 가끔의 좌절에도 나만의 품위를 잃지 않고 계속 잘 먹기 위해 (공격적이건 방어적이건) 길을 나서는 일이 바로 아가씨의 태도라고 준하와 나는 믿는다. 실패는 달콤하고 성공은 짭짤하다. 잊히지 않는 감칠맛만이 혀끝에 남기에 우리는 도전한다…
안녕하세요, 와니입니다. 글꼬리에 인사하는 것은 처음이네요. 오늘은 ‘아가씨의 식사일기’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실은 ‘아가씨다운 식사’라는 관념은 친한 친구들끼리 아가씨 말투로 서로를 부르는 농담에서 비롯되었는데, 농담에 욕망과 소원과 생활이 달라붙어 이야기만큼 커졌고, 결국 반년 간의 긴 생각들이 되었습니다. 함께 농담도 생각도 더 웃기고 먼 곳으로 발전시켜 준 준하에게 감사합니다. 공개적인 곳에 시간과 주제를 정해 업로드했지만 여전히 이 생각들은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나 오늘 글에 썼듯이 우리 모두의 식사가 사적이지 않은 만큼 이 기록도 사적이지만은 않겠지요. 매일 좌절하지 않고 잘 먹는 일은 저에게는 정치적 투쟁이고 삶의 지속입니다. 지속적 투쟁이고 삶의 정치이기도 하지요. 경양식 레스토랑 ‘키친 마카로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런치의 여왕>에서 주인공 나츠미가 인생의 위기마다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점심 식사 한 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고, 오므라이스 한 접시가 그러기도 한다고요. 어떤 식사가 당신을 구했나요? 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저는 계속 묻고 싶습니다.
사진: 드라마 <런치의 여왕> (2002년 일본 후지테레비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