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안녕하세요, 와니입니다.
오늘은 와니와 준하가 함께 다녀온 <홍콩 여행과 여행지에서의 식사 경험>에 관해 씁니다. 지금 사실대로 실토하자면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식사 실패의 기록입니다. 여행지에 가면 온 김에 잔뜩 먹겠다고 쉽게 들뜨게 되지만, 낯선 식재료나 향신료에 맥을 못 추리거나 속앓이를 하느라 고생하기도 하고, 메뉴를 잘못 주문하거나 생각보다 별로인 식당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해프닝도 많이 만나게 되지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기억에 남는 하나의 식사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실한 여행이라 부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글은 제가 잊을 수 없는 홍콩에서의 식사, 그리고 또한 잊을 수 없는 어떤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주에는 준하가 홍콩 여행과 식사에 관해 씁니다. 사흘 동안 홍콩에서 저와 식구가 되었던 준하의 기억에는 무엇이 선명하게 남았을까요? 다음 주도 기대해 주세요!
책이나 주소를 이용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게 아니라 걸어서, 눈으로 보아서, 습관으로, 경험으로 안다. 이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모두 강렬하면서도 취약해서, 내 안에 남은 흔적의 기억을 통해서만 반복 혹은 회복 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곳을 처음으로 방문하면 그것에 대해 쓸 수 있게 된다. 적힌 주소로는 알 수 없고 장소가 스스로 글을 만들어내야 한다.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 로런 엘킨, <도시를 걷는 여자들>, 홍한별 옮김, 반비. 에서 재인용.
지도를 보고 목적지까지 가는 일은 나랑 안 맞아,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걸었다. 여행 내내 뼈저리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더운 날씨와 목표를 향해,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녹초가 되어서 길거리에서 무심코 표정이 구겨졌다. 친구들에게 미안해져서 열심히 얼굴을 폈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습게도 그들도 왠지 모르게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무더운 도시에서 이렇게나 까칠한 얼굴을. 나는 유난히 지도를 보는 일을 견디지 못해서, 우리는 어딘가 가서 앉아서 쉬지 못해서 좁은 보도뿐인 홍콩 길거리를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점점 지쳐갔다.
그러니까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소문난 맛집에 잘도 찾아가서 충족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다르게, 내가 밥때를 놓쳐가며 헤매야만 여행했다고 느끼는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나는 정처 없이 걷기를 즐기면서도 만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처럼 숨겨진 맛집을 귀신같이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은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기심은 많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좋아하지만, 그건 선뜻 가게에 들어가 구경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구매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제대로 된 식사가 중요한 사람이니만큼 매일의 힘주지 않은 걸음걸이도 중요한 나에게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는 여행은 연속적인 불안에 가깝다. 그러니 제대로, ‘아가씨다운’ 한 끼 먹는 일을 금같이 여기면서도 여행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아니다. 줄을 서거나 예약을 하는 일은 할 수는 있지만 먼저 손에 땀부터 난다. 이름을 부르고 물을 따라주고 코스 요리를 가져다주는, 여행이라 기분 내고 싶어 찾아간 식당에서는 목에 뭔가 걸린 다람쥐처럼 쪼그라들어 버린다.
누군가는 간이 콩알만 한 겁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걷고 고개를 돌리고 마주칠 때에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에만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게 걷다 보면 신기하게 무언가와 반드시 만난다. 길거리 표지판에 붙은 웃긴 스티커나, 홍콩섬의 감옥에 수감되었던 죄수들은 밥을 얼마나 먹었을까(양식인지 아시아식인지 고를 수도 있었네…) 같은 뜻밖의 사실을. 헤매며 걷다 보면, 길을 잃을까 싶은 불안은 사라지고 짧은 시간에도 풍경이 점점 눈에 익는다. 알아볼 수 있는 거리 이름이 늘어나고 자신 있게 숙소로 돌아갈 수 있는 경로의 수가 늘어난다. 배는 좀 주려도… 허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예상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때 채워진다.
그러나 홍콩은 이상하게 모르는 것들 만큼이나 어쩐지 낯익은 것들과도 마주쳐야 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영화 속 잊을 수 없는 장면들에 나왔던 장소들을, 지도에 검색해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알아보는 일이, 영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왕왕 있었다. 여행 몇 달 전에 계획을 짜며 ‘여기 꼭 가서 경찰한테 쫓기는 것처럼 도망쳐야 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약속했던 곳에서, 도망치는 시늉은 안 하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다. 그런 곳들에서 나는 무척 익숙하게 안다. 그 자리에 속했던 적 있는 것처럼 안다. 알고 싶어서 여행에 나섰지만, 낯설어서 불안한 마음과 이미 아는 도시인 듯한 착시가 공존하는 상태로 홍콩을 걸었다.
하지만 어떤 곳에 관해 더 알기 위해서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은 무언가와 반드시 만나기 위해 목적지를 찾아가야 할 때도 있다. 내 안에 남은 이미지들과 분명 현실에 있는 어떤 것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홍콩문화박물관이 그런 경우였다. 도심과 꽤나 떨어져 있어 전철을 타고도 또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이었지만, 홍콩 영화에 푹 빠진 우리는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보러 박물관에 갔다. 폐관이 몇 시간 남지 않아서 마음이 바빠졌다. 임청하가 <중경삼림>에서 입었던 의상이나 LP 커버에 그려진 매염방 얼굴을 찾으러 박물관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러다가 매염방이 생전 마지막 콘서트에서 입었다는 웨딩드레스를 실제로 보고 슬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장국영이 공연에서 신었다는 빨간 하이힐을 두 켤레나 지나치며 (정말 우는 건 부끄러우니까) 속으로만 울고. (절친했던 두 사람은 올해 20주기다…) 즉석에서 합성을 해주는 카메라 앞에서 영화 <가유희사> 포스터의 주성치 자리에 서서 주성치를 뺀 나머지 출연자들과 사진을 찍고. 고개만 돌려도 아는 얼굴들이 속속 등장하는 통에 서둘러서 오느라 점심은 먹지 못했어도 마음은 배가 불러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큰 화면으로 반복 재생해 주는 홍콩 영화의 역사 압축 영상에서 허름한 얼굴로 총을 겨누는 양조위의 얼굴에… 더 이상은 못 걷겠어… 하염없이 두리번거리기만 해도 허기가 채워진다니 여기 정말 멋진 곳이다, 응?
배가 고팠다. 전시 세 군데를 돌아보고 나서는 밀려오는 좋아하는 것들에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배가 고파서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념품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하게 박물관 밖으로 나와, 야외 벤치에 네 명이 나란히 앉아 낮에 침사추이에 있는 유명 베이커리 체인에서 산 에그타르트를 허겁지겁 꺼내 들었다. 와. 에그타르트네. 명물 디저트를 충분히 감상할 시간도 없이 곧장 입에 집어넣었다. 사실 맛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한 달 남짓 지난 지금은 옷에 지저분하게 떨어진 파이 가루를 땅바닥에 대충 털어냈던 기억만 남았다. 하지만 그 배고픔의 순간에 손에 단것이 들려 있었다는 안도감이 방금 사랑하는 것들을 잔뜩 만나고 나왔다는 배부름과 겹쳐 잘 모르는 곳의 공기를 편안함으로 바꾸어 놓았던 감각만은 오랫동안 기억할 것만 같다.
다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내가 이미 아는 어떤 곳들을 다시 마주치는 감각.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지만 가본 적이 있다. 평범한 관광객처럼 밀크티에 시럽 듬뿍의 느끼한 홍콩식 프렌치토스트를 먹은 미도카페에서는 비가 온다. 비가 와서 축축해진 나무들 사이를 건너 향 냄새가 나는 건물 한가운데의 사원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사진을 본다. 그곳에서 나는 이름을 아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향에 불을 붙이는 화로의 온기와 그들의 존재로 따뜻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밖에 발음할 수 없다. 원래 이름으로는 또박또박 부를 수 없다. 만난 적 없는 그리운 귀신들을 소환하는 의식은 불가능하다. 입안만 시럽과 버터로 미끈하고 달콤해서 그 자리에서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배가 불렀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가는 것은 홍콩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 불가능하겠지만… 발은 붕 뜨지 않고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결국 버터와 설탕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