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한 움큼의 세월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장 속에서 나는 긴 숨을 토해냈다. 한 벌 한 벌에 담겨 있는 세월의 주름은 얼마나 깊은지, 또 나는 그것을 얼마나 선명하게 기억하는지. 백사장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모래알들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나의 삶을 스쳐갈 때에도 옷은 일정부분 그 모래알들을 담고 있었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기쁨에 겨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그 기쁨을 온 몸으로 느낄 때에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빠져 나를 찾아 방황하던 때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덤덤한 순간에도 옷은 그 자리에 있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사람의 의도에 따라 감정에 따라 재편되고 마는 임의적인 것이어서 어쩌면 나의 뇌보다는 이 옷이 나의 삶을 더 잘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냉정하게. 그쯤에서 나는 사색을 멈추고 손을 들어 나의 세월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옷걸이에서 벗어나 힘을 잃은 옷들은 차례로 바닥에 쌓여갔다. 차곡차곡 쌓여진 옷들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헌 옷 수거함으로 향해졌다. 자, 이제 나의 어지럽던 세월은 안녕이야. 하듯 시원한 손놀림으로 옷을 넣었다. 손은 점점 빨라지고 파도가 때를 맞아 거세지듯 감정이 북받쳤다. 옷장을 통째로 헌옷 수거함에 버린 나는 힘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전부터 꼭 버리고 싶은 것들이었는데, 내 아픔과 슬픔의 역사책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버리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 걷는 발걸음에 후회는 없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하나의 아픈 기억들이 커다란 장벽을 넘어 추억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래, 이렇게 걷다보면 언젠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삶을 걸을 수 있게 될 테다. 이렇게 걷다보면 삶이 어딘가 쉬워지고 경쾌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나의 삶으로 끝없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