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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Apr 24. 2020

나는 아직도 스포츠 키드에 머물러 있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응모작

1992년 바르셀로나.

당시엔 이름조차 생소했던 그곳은 TV 속에서 뙤약볕만 가득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 4년의 시간을 굵은 땀방울로 토해내는 선수들에게 가장 큰 적은 눈 앞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작열하는 빛과 열의 혼합물은 그만큼 지독했으며 그만큼 눈부셨습니다. 저는 그 해 여름만큼은 그 빛에 몸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별세. 남겨진 11살 소년은 아무 생각 없이 밝고 따뜻한 그 뙤약볕이 좋았습니다.


마치 종교인 양, 볕이 인도한 길을 따라 스포츠 선수들을 마음으로 쫓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들은 정직한 노동자였습니다. 노력한 만큼 쏟아내고 집중한 만큼 결과를 받았습니다.

단지 육체적인 기예의 화려함에 반했다기보다는, 그들이 실천하는 노동의 경건함에 저절로 존경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안방의 작은 TV는 노동 현장의 축소판이었습니다. 평일 저녁의 공중파 야구 중계, 토요일 오전 AFKN에 나오는 메이저리그 경기, 일요일 오전 SBS가 중계하는 NBA. 집 안이 좋았던 저는 집 밖을 그런 방식으로 체험하며 스포츠 키드가 되어 갔습니다.


특히 메이저리그는 제가 가진 아주 작은 권력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ESPN의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꼭 봤고, 영어공부 하라며 어머니가 신청해주신 영자신문은 메이저리그 경기 기록란만 챙겨봤습니다. 덕분에 저는 친구들로부터 그쪽 이야기는 도맡아 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힘도 백도 없었던 자에게 주어진 알량한 권력의 맛. 희소한 외국의 정보인 데다, 멋있는 사람들의 퍼포먼스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에 값이 나갔습니다.


스포츠를 통한 지식의 여정은 대학교 때 육체의 여정으로 노선을 변경했습니다. 심한 허리디스크로 누워있던 일상, 힘센 사람이 위로가 됐습니다.

제 허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선택된 자들은 일본의 격투기 단체 <프라이드>의 이종격투기 선수들이었습니다.

선수들의 여러 기술 중, 트라이앵글 초크가 힘이 됐습니다. 통증 때문에 누워 있는 저와 같은 자세에서 힘과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 순간은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로 다가왔습니다. 그 기술이 주특기였던 브라질리언 탑팀의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 제가 허리디스크 통증을 극복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라질 배낭여행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떠난 배낭여행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브라질리언 탐팀 체육관.

땀으로 가득 찬 그의 큰 손과 악수하던 촉감을 떠올리면 아직도 짜릿합니다.


광고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주니어일 때, 본인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로 PT를 했습니다.

고심 끝에 결정한 타이틀은 <평창, 그곳엔 아름다운 피날레가 있었네>.

재수에 실패한 평창의 세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 도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평창의 도전은 저의 도전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1992년 뜨거웠던 바르셀로나의 태양이 올림픽을 저의 운명으로 이끌었듯,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과 저는 연대의식이 있었습니다.

“Third time is the charm”. 세 번째의 행운을 뜻하는 속담으로 시작한 PT는 농구 리바운드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리바운드를 제일 잘 잡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키 큰 사람? 점프력이 좋은 사람? 모두 틀렸습니다. 상대가 던진 공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개최지 발표일. 우리 모두의 믿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며칠 뒤 평창에는 8년 동안 기다렸던 낭보가 울려 퍼졌습니다.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평창이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2021년의 도쿄 올림픽으로 배턴을 넘겼습니다.

저는 평창 이야기를 주제로 PT를 했던 그 회사를 아직도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 마치 스포츠인들처럼,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좋은 곳입니다.

물론 변화를 향해 꿈틀거리는 생물학적 욕구가 이직 없는 저를 매너리즘으로 유혹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스포츠 키드가 태어났던 1992년 여름의 우리 집을 떠올립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행복했고 위로가 됐던 시절.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저는 아직 스포츠 키드에 머물러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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