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한 여자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기에 이른다. 주위 사람,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뜯어말리던 그 일은 다름 아닌 책방을 여는 일이었다. “책 팔아서 몇 푼 번다고? 책방에 쓸 에너지로 애들 잘 키우는 게 돈 버는 거다.” 판에 박힌 말들을 수백 번은 족히 들었을 거다.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그 많고 강하던 만류에 굴하지 않고 책방을 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쪼그라든 내 자존감, 점점 잃어가는 존재감을 심각하게 마주하고 난 뒤 치러내는 홍역 같은 오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주저앉으면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 그래 처음은 그랬다. 동네 책방을 열어 독서문화부흥에 보탬이 되거나 작은 공동체를 이뤄내겠다 하는 생각은 후차적인 것이었다. 내가 살고 봐야겠기에 나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 그 긴박성에 의한 출발이었다.
칙칙칙 돌아가는 밥솥을 멍하니 바라보다 내게 가만히 묻던 말.
“나는 고유한가? 나는 무엇으로 설명될 것인가? 나에게 떳떳한가? 내 아이들에게 떳떳한 엄마인가?” 온실 속 화초처럼 고만고만하게 살았을 뿐 치열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 지난날. 후회와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되돌리지도 못할 그날에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 들까 머리가 아찔했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책이 떠올랐다. 되돌릴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처절한 후회를 마주하던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가슴속에 콱 박혀 떠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 삶의 대수술을 감행해야 한다.
떠 밀려가는대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는 타인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삶이 아닌 내가 설정한 방향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면 적어도 후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내게 책은 선생님이자 나침반이었다. 내 삶의 대반전을 이뤄낼 정도로 치열한 독서여야만 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장치가 바로 책방이었다.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자신의 삶, 나약한 물음 한 꼭지씩 들고 와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난날을 복기해나가기 시작했다. 취미 거리나 여흥을 위한 독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읽었다.
나를 성장시키는 책방
책방의 시간이 쌓일수록 바닥을 드러내던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 외려 책이 내 마음을 다시 읽어주는 묘한 경험들이 늘어났다. 단절되어 외롭기만 했던 마음을 천천히 분해해가며 바라보았다. 자신의 마음을 공감한다? 내 마음은 내 것이라 공감하고 말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껏 내 마음 돌봄에 참으로 취약했구나. 책을 읽어가며 내 마음을 알아갔다. 그제야 일상의 언어에서 벗어나 인간 본위의 언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옆집 아줌마를 만나든, 나를 아주 잘 아는 어릴 적 친구를 만나든 일상의 언어 이 외 소통은 불가했다. 내 마음을 추슬러 내 마음 같은 사람들이 책을 매개로 모여든다. 눈빛을 반짝이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일상 언어보다 책과 삶에 대한 진지한 언어들이 오갔다. 어떤 답을 구한다기보다 내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는 데 벌써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었다. 책과 나와 당신, 서로의 마음을 붙들어 엮는 힘은 자존감의 회복이라기보다 차라리 치유에 가까운 것이었다.
4년의 시간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이 변했다. 물론 책방 운영을 해가면서 시행착오를 겪을 때도 많았다. 어린아이 둘을 돌보고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해나가며 책방을 운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 좋자고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일을 하려니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특히 아이가 아픈데도 책방 문을 닫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은 하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어느 정도 책방의 성장이 보일 무렵 코로나19가 시작되었다. 석 달 책방 문을 닫고 있자니 앞으로의 책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암담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때마다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고여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힘든 일은 힘든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항상 나를 성장시키기에 합당한 것들이었다. 3년이 가고 4년의 시간이 흐르니 이제야 아주 작고 왜소했던 내면 아이가 훌쩍 커서 내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인터뷰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4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책방을 열겠습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책 모임 할 에너지로 집 살림 살뜰히 챙기라던 남편의 서운한 말에 눈물을 훔치더라도, 월세 내고 책 들이면 이만 칠천 원 남았던 통장 잔고를 써 놓은 책방 초창기 다이어리를 보면서도, 등 따시고 배부른 아줌마의 교양 놀이 즈음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말들을 뒤로하고서라도, 나는 다시 헐레벌떡 바쁜 아침을 가르고 책방 문을 열 것이다.
서슴지 않고 다시 돌아가도 책방을 열겠다고 한 이유에는 다름 아닌 나의 성장이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아프게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프지 않다. 남 눈치 보느라 내 시간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그 소극의 시간이 이제는 사라졌기 때문이고 나를 짓누르던 콤플렉스 덩어리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엄마들 몇, 학창 시절 친구들 몇이 다였던 좁디좁은 관계의 망이 선하고 좋은 사람들로 확장되었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니 자존심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쓴 옹졸의 영역은 180도 바뀐 상황이 되어 있어서 그렇다. 쉽게 포기하고 합리화하기에 바빴던 내가 이제는 한다면 기필코 하고 마는 결단과 끈기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책과 책방은 배움의 장이며 나의 수련의 장이 신명 나는 꿈의 발판이다.
타인으로 건나가는 힘
내 마음에 힘이 생기니 이제 어설프더라도 조금씩 타인의 마음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힘든지 들어만 주어도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바탕 쏟아낼 공간을 만난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 고마운 모양이다. 넋두리에 가까운 수다로 시작되더라도 종국에는 책이 물어오는 끊임없는 질문 앞에 본질적인 자신과의 대면이 이루어진다. 안일했던 일상들, 종속인 줄 모르고 살아온 “자신 없는 삶” 속에 책은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꼭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들에 집중하게 만든다. 삶의 질문이 끊임없이 발생되는 곳, 나의 범위에서 상대의 범위만큼 혹은 책이 펼쳐놓는 세계로 걸어가다 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던 사람들이 비로소 빅 히스토리 앞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그 속에서 고유하게 자신의 무늬를 찾아가는 일, 이 어마어마한 일들이 모두 책방에서 일어난다.
매우 늦은 시간이지만 메시지가 건너온다. “선생님 책방을 열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밤낮없이 어느 때고 문득문득 마음들을 전해 온다. 때로는 거금의 후원금이 통장에 찍혀 매우 당황스러운 일도 있었다. 헐레벌떡 전화를 걸어 차라리 책을 사주시라고 전했더니 책방이 존재하려면 책방지기가 건강해야 한다고 꼭 소고기를 사먹으라신다. 당신이 책방에서 받은 것이 더 크기에 부담을 내려놓으라고도 했다. 책방이 어떤 에너지로 다가오고 있다 하는 고백을 내며 시시 때때 내 등을 쓰다듬어주시는 책방 손님들의 손길에서 느낀다. “이것이 작은 기적이구나! “ 나의 변화가 시급하여 열었던 책방은 곧 사람들에게 건너가 저마다의 이유로 책방을 존재하게 했다.
책방, 사랑방을 넘어서는 혁신의 장
흔히 동네 책방이라고 하면 주인장의 독서 취향이나 삶의 방향이 묻어나는 책들을 골라놓은 공간? 쯤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어떤 책 읽으면 좋아요?” 책방 주인과 정겨운 대화를 주고받다가 책 추천도 받는 책 정보의 요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독서 모임을 꾸리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주고받는 사랑방 같은 정겨움이 어린 곳.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책방은 동네 사랑방 같은 1차원적 기능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책방 여러 모임을 통해 사람들의 변화를 목격(?)하였다. 책방은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뛰어넘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중이다. 책은 삶의 본질적 의미를 건드리는 장치다. 자신의 삶에 긍정적 자극과 새로운 의식들이 들어오게 되면 더욱 높은 시선으로의 앎이 생기고 앎은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되어 행동의 변화를 이끈다. 즉 한 개인의 삶이 변화되는 단초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책방이다.
좁디좁은 내 시선의 장막이 걷히고 다양한 스펙트럼이 열리는 곳, 삶의 여러 좌표에서도 유연할 수 있는 사유가 길러지는 곳, 불완전한 인간이 서로의 결핍을 메워가며 응원을 주고받는 곳,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기꺼이 나누는 곳. 자신의 이야기가 비로소 고유한 무늬로 그려지는 공간, 책방은 그런 곳이다.
혼자 꾸는 꿈은 한갓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훈데르트 바서의 말 “혼자 꾸는 꿈은 한갓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다. 좋아하는 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이 말처럼 현실이 되는 꿈들을 체험하기에 책방에 제격인 이 말을 사랑한다.
소심하기 그지없던 아기 엄마는 이제 책방 5년을 향해 달려가는 책방지기가 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24시간은 변함없지만 하루가 48시간 같은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매월 열아홉 번의 독서 모임을 리드하고 매주 2시간은 꼭꼭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가진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고 새벽 다섯 시 반 어김없이 새벽 독서 한 시간을 채운다. 매일 짧으나마 한 편의 글을 쓰고 한 달 네다섯 권의 책을 깊이 있게 완독 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코로나 이후 랜선 커뮤니티를 만들어 책방과 언택트가 가능한 공존의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대구, 구미에서부터 멀리 파주까지 언택트로 책방이 작동한다. 많은 책방 모임에 참여하는 책방 회원들과 반드시 가능하다고 믿는 꿈을 이야기한다. 여기저기에 다 있는 책, 책방이면 어느 할 곳 없이 꾸려지는 독서모임에 안주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시도해보고 남과 다른 삶의 무늬를 발생시키기 위해 늘 고민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함께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여기 모인다.
한 두 사람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던 생소한 아홉 평 작은 책방은 이제 곧 조금 더 커진 공간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다. 사람들의 넘나듦으로 인해 문지방이 예쁘게 닳아 있다. 꿈이 그려지는 생기 넘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책방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곳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곳, 서로의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곳, 건강한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곳, 저마다의 꿈이 현실이 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