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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Apr 27. 2022

세이 쇼나곤의 세 겹 부채 그리고 나의 알맞음

보이지 않게 디테일하게




쇼나곤이 보기에는 작디작은 요소가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쇼나곤은 세 겹 부채는 좋아하지만
다섯 겹 부채는 용납하지 않는다.
(다섯 겹 부채는 "너무 두껍고 밑 부분이 못생겼다.")
공기 중에 눈이 올 듯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기쁘지만
"비가 올 기미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은 그날의 분위기를 망친다."
1센티미터 삐끗하는 것은 1킬로미터 삐끗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나곤이 진정한 기쁨이라 선언한 것은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알맞아야 한다.
분위기와 계절에 어울려야 한다.
본질에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름에 극도로 더울 때가 최고이며, 겨울은 지독히 추울 때가 최고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식 세이 쇼나곤을 소개한 대목마다 참 마음에 든다.

"쇼나곤은 구석에 살았다. 아름다운 구석에"라든가

그녀가 손꼽은 기쁨이 꼭 완벽하지 않더라도 알맞아야 한다는 식의 말.

공감을 너머 이 말들이 나와 "알맞다"라고 느낀다.


김밥을 두 줄 샀다.


집에서 급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오거나 오전 모임을 마친 후 모임 샘들과 간단한 점심을 먹는 편인데 오늘은 김밥 두 줄을 사서 긴히 누군가 나눌 말이 있다.


이사 오기 전에는 책방이 협소해 여유 공간이 없을뿐더러 혼자 모든 일을 해야겠기에 나의 알맞음은 내 손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지금 공간으로 이사를 오고는 책모임 외에도 커피를 드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마련되었고 내가 책모임에 들어가 있을 때 카페를 맡아줄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했다.


이제는 나의 <알맞음>이 책방 <알맞음>이 되기 위해서라도 민지 씨나 혜인 씨나 성윤 씨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늘은 민지 씨가 일하는 날이고 김밥 한 줄의 주인공은 민지 씨다.

김밥이나 차 한 잔 등 분위기를 완화해줄 다른 매개 없이 <나의 알맞음>을 이야기하는 건 "지적"이나 "꼰대"나 자칫 "갑질"로 보일 수도 있기에 김밥 먹는 핑계로 세이 쇼나곤의 세 겹 부채와 같은 이야기를 할 참이다.


내게 세이 쇼나곤의 "세 겹 부채"여야 하는 것이 있다. 다섯 겹의 부채가 용납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개인적인 것은 개인적인 <알맞음>으로 남기면 될 터이고 무수히 많은 상황별 알맞음이 있겠으나 오늘은 김밥을 빌린 <알맞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지 씨 차를 데우는 워머의 초가 2시간 모임 중간에 꺼지지 않도록 해 주세요!~"

(완만한 억양, 간곡히 들어간 부탁으로 <나의 알맞음>을 이야기한다.

 모임 세팅 때 쓰다만 초를 다시 켜 두었기에 나온 말이다. 새것으로 2시간을 견디도록 세팅을 해 달라는 말이었다.


오늘 수요 독서회 모임 중간에 꺼진 초를 발견했다.

봄이 완연한 절기, 초가 열심히 차를 데우지 않아도 차는 차갑거나 먹기에 불편하지 않은데 구태여 그 꺼진 초를 들고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새것으로 갈아왔다.


책모임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느낄지 모르겠지만 (거의 못 느끼실 걸로 생각된다) 음악의 템포와 소리 크기 또한 민감하게 조절하는 나다. 오고 가는 말의 속도에 음악의 박자가 맞지 않으면 다른 음악으로 바꾼다. 조금 더 집중해야 할 이야기 농도가 되면 음악 소리를 낮춘다. 음악이 너무 커도 사람들의 말소리를 잡아먹고 또 너무 조용하면 사람 사이 공기가 냉랭하다. 상대는 감지를 못하더라도 나의 알맞음은 끊임없이 작동되고 작동되어야 한다. 말소리의 오고 감 안에 적절한 템포와 소리로 음악은 반드시 흘러야 하고 날씨나 모임별 그리고 때로는 모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질과 성격까지 나름 고민해 음악을 고른다.


봄, 낮 기온이 올라 밖이 더워도 북향인 책방에는 햇살이 없다. 사람들이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공간이 써늘하다고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온풍기의 더운 공기가 코끝을 마르도록 해서도 안된다. 아늑하되 덥지 않도록 하기. 냉난방기의 리모컨이 내손에서 자주 쥐어져 있는 이유도 알맞음 때문이다.


모임을 시작하기 앞서 준비되어야 할 것들.

아메리카노를 보온병에 담고 유자차나 박하차나 귤피차나 꽃차 등을 번갈아가며 준비한다.

초를 켜고 홀과 분리되는 폴딩도어를 닫고 하얀 커튼이 쳐진 것까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워머와 보온병 아래에는 책방 초기에 손바느질한 티 테이블 받침을 깔아 두어야 하고 토론 중간중간 그날에 맞는 화면과 음량을 조절할 수 있는 리모컨, 초가 꺼질 때를 대비한 티 라이터, 냉난방기의 리모컨까지 3개의 물건까지 내 자리에 세팅되어야 해당 모임의 준비가 끝난다. (이제 이쯤은 우리 아르바이트생들도 척! 척!이다) 조금 더 알맞음에 접근해야 할 것들도 없지 않지만 일일이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내 선에서 처리한다.


며칠 전에 산 노란 튤립이 화병 안에 너무 뭉쳐 있지 않을 것,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각의 송이가 돋보이되 의도적이지 않게 할 것! 꽃줄기 높이와 화병 높이 비율이 적절할 것! 꽃꽂이 선생님도 아니고 테이블 세팅 전문가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책방에 어울려야 하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할 기준 그렇다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알맞기는 해야 할 것들이 내게도 구체적이다. 인테리어를 떠나 책을 놓고 마음의 이야기가 오고 갈 2시간의 공간감과 분위기가 <알맞게> 연출되어야 한다.


손님이 책방 입장과 동시에 주문대에 서서는 어디선가 아로마 향이 살짝 나야 하므로 물 50ml 정도에 에센셜 오일 두 세 방울을 떨어뜨리고 아래 초가 켜져야 책방 오픈이 시작되는 거다.(코로나 이후 마스크 착용으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겐 알맞음 안에 들어올 것들이다.)


오전 모임을 마치고 홀에 나갔더니 친구와 친구 지인이 촉박한 점심시간을 쪼개 커피를 마시고는 막 일어선다.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네고서는 책방 공간의 온도와 음악 소리를 본능적으로 체크한다. 알맞지 않다.

손님은 가셨고 그들이 느꼈을 분위기는 과거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그 과거를 다음의 미래로 써서 <알맞음>을 조금 맞춰주시라 민지 씨한테 이야길 할 참이었던 거다.


'공부하시는 손님이 혼자 계실 때는 음악소리를 최대한 낮춰주세요. 그렇다고 음악소리를 다 죽여놓지는 마세요. 그러고 있다가 공부도 책도 아닌 딱! 카페를 이용할 목적으로 찾아오시는 커피 손님이 오시면 음악소리를 조금 더 키워주세요. 그렇다고 음악이 공간을 다 뒤덮도록은 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최대한 간추리고 지적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도록 짧게 이야기한다. 김밥을 먹어가며. 마치 김밥이 핵심이고 우리의 이야기가 곁인 것처럼 나의 <알맞음>을 전달한다.


남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들 중에서도 <나의 알맞음>, <우리 책방의 알맞음>이기 위해 예리하게 작동되는 것들이 있다!

'뭐 그리 까탈스럽게 굴어? 음악 없는 카페가 어디 있나? 더우면 다 에어컨 켜주고 추우면 다 난방기 틀지 무슨 유별나게!'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두세 가지 예가 온도와 음악소리와 초의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알맞음의 영역은 많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내 부모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나의 사는 방법에 대해서, 내 시간 운용 철칙 같은 것.

쇼나곤의 부채 세 겹 같은 알맞음, 그 알맞음으로 비롯된 나만의 기쁨. 핵심이나 본질이 아니고 완벽하지 않지만 꼭 알맞아야 하는 그 기묘한 영역!


타인의 알맞음으로 나의 알맞음을 대신하지 않기 위해, 나의 알맞은 정도를 모른 채 되는대로 대강 뭉뚱그려 살지 않기 위해, 그러려면 나의 알맞음이 강박의 스트레스나 삶의 독이 되지는 않아야 하고 나만의 알맞음이 내 고유의 기쁨으로 재탄생되어야 한다는 것까지도 생각한다.


나의 <알맞음>이 어딘가, 누군가로 흘러들어 뭔지 잘 모르겠으나 '그냥 좋다~' 정도의 건너가는 알맞음이 되길 바란다.


세이 쇼나곤의 알맞음을 깊이 공감한다!

그것을 알아본 에릭 와이너도 쇼나곤의 알맞음을 알맞게 알아본 것이리라.


다행히 김밥은 알맞게 맛있었고 민지 씨도 나의 이야기에 알맞게 호응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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