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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kArt Jan 16. 2024

혼자 떠난 스페인 여행

세비야 여행 스케치북(2)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탑을 샤프로 그렸다. 연필은 현장에서 깎는 게 불편해서 주로 2h 샤프심이 들어있는 0.5로 큰 덩어리를 잡고, hb심이 들어있는 0.3 샤프로 묘사를 한다.

 이곳은 세비야의 엘리자베스 다리다. 야경이 특히 아름다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처음 이곳을 지날 때 노을이 질 때쯤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길에 앉아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래서 그다음 그곳을 찾을 땐 마트에서 산 저렴한 와인 한 병을 마시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어떤 날은 컨투어 드로잉으로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그리기도 했다.

 세비야에서의 33일 중 나흘은 그라나다, 사흘은 말라가, 이틀은 론다, 당일로 가려던 네르하에선 아름다운 풍경에 계획에도 없던 일박을 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바라본 풍경을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다.

 말라가는 피카소가 태어난 곳이다. 스페인 여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피카소를 좋아해서 청년기의 작품들도 보고, 피가소 생가와 피카소가 자주 갔던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싶었다. 그런데 생가와 박물관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었다. 나에게는 너무 의미 있는 곳이라 그 공간을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땐 이렇데 컨투어 드로잉으로 기록한다. 컨투어 드로잉은 묘사보다는 형태에 집중해 빠르게 그릴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리고 삐뚤빼뚤한 선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실제로 그림을 그렸던 생가의 작업실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나 협소한 공간, 오랜 시간을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땐 컨투어 드로잉으로 그린다.

 색연필로 그린 말라가의 노을 지는 해변, 네르하의 해변이다.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네르하는 유럽인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어 조용하고 한적했다. 이 그림을 보면 돗자리를 펴고 누워 방울토마토와 맥주를 마시며 이 풍경을 그리면서 행복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론다에서는 테라스에 앉으면 누에보 다리가 보이는 곳으로 숙소를 찾았다. 아찔한 절벽 위 건물들의 하얀 벽에 서서히 노을이 물들고, 협곡 사이를 잇는 누에보 다리 아래 조명이 켜지면 도심에선 보기 힘든 새카만 밤하늘이 빠르게 찾아온다.

 이 그림은 누에보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인데, 피부색 마카로 얼굴을 칠하고 사람들의 특징을 색연필로 간단히 표현했다. 실제로 여행지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고 스케치북을 볼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스케치북의 많은 그림 중 이 그림을 가장 많이 좋아해 주셨다.

 가장 공들여 그린 이 누에보 다리보다도:) 여기서는 그림을 그리는 다른 분을 만났는데, 대학생인 미국인 친구 둘이 와서 한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옆에서 다른 한 친구는 기다려주며 풍경을 감상했다. 나는 주로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구석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데 이 친구는 론다 다리가 정면으로 보이는 바위에 다리를 하나 턱 하니 올리고 무릎에 스케치북을 올려둔 채로 그리는데, 멋들어진 그 모습에 ‘아 저런 점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서로의 스케치북을 보면서 다녀온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스케치북 가득 여행지를 그림으로만 채웠다면, 그 친구는 그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글로 쓰고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그려두기도 하고 여행 루트를 간단히 적고 상징적인 그림들을 아이콘처럼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록하는 게 참 인상 깊었다.

 론다에서 돌아와서는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곤 빠에야의 본고장인 발렌시아에서 사흘간 보내고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일주일 정도 더 머무르며, 늦게나마 바르셀로나도 그림으로 담을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바르셀로나 대성당도 그리고,

 피카소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장소인 포캣츠(Els 4 Cats) 레스토랑은 피카소의 단골집으로 당대의 예술가들이 모여 토론과 사교를 위해 사용했던 아지트였다고 한다. 피카소가 여기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외상값을 그림으로 갚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도 3번을 들러 그림을 조금씩 그려 나갔고 마지막 날에는 시간이 없어서 컨투어 드로잉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 그림은 포캣츠에서 리그램을 해주셨다. 뭔가 피카소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장소인데, 더 기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입장시간이 돼서 스케치도 다 못 마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산 파우 병원과 바르셀로나 근교의 시체스 해변은 색연필로 그렸다.


 6개월 정도의 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당시 발목 수술 중 오른손 신경에 문제가 생겨서 회복 중이었고, 이미 계약된 작업 이외에는 거의 그림을 안 그리던 시기였다.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었지만, 세밀한 작업이 어렵고 스스로의 그림이 만족스럽지 못하니 스케치를 시작하기조차 싫었다.

 그림을 그렇게 오래 안 그려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내 모습을 보며, 어느 날 저녁 동생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그림을 안 그리는 지금 유럽 여행도 하고 몰타라는 곳에서 어학원을 다녀보는 건 어떠냐고.

 몰타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가까운 곳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있다는 것 만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2주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몰타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혼자 떠나게 되었다.

 양자 협정이니 쉥겐이니 대사관의 애매한 답변에 쫄보인 나는 왕복으로 끊었던 티켓인 이태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편을 취소해야 했고(갑자기 떠나와 시작만 몰타로 정하고 이태리 또는 스페인에서 두 달 정도 있다 올 계획이었다. 처음 여행 기간도 발목에 박힌 핀 제거 수술을 잡은 일정에 맞춘 거였다.), 그렇게 된 김에 원래의 5개월이 조금 넘는 일정에서 2주를 더 늘리기로 했고, 모스크바도 가볼 수 있었고, 바르셀로나에서도 일주일을 더 머무르며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싫었던 시기라 떠난 여행에서,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오히려 조금씩 그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밀한 그림은 여전히 그릴 수 없었지만 가볍게 툭툭 색연필로 작은 그림들을 그리면서.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무심코 집어 들었는지만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로 캐리어 깊숙이 넣어져 있었던 스케치북을 한 달 정도 지나 세비야에 도착해서야 뜯게 되었다.

 첫 장을 스페인 광장을 그리고 이후론 그냥 눈앞에 보이는 풍경, 단순히 여행을 기록하기 위한 그림이 매개체가 되어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주고 내 여행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좋은 기억을 여러 사람들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행 드로잉 수업을 하고 싶었고 여기저기 수업할 만한 장소를 찾아봤지만 마땅치 않아 직접 화실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시린 겨울 같았던 시기를 지나 나를 다시 찾게 해 준, 봄 같은 여행에서의 추억을 나누고 싶어 지금은 그림과 여행을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며 여행 드로잉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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