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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kArt Jan 09. 2024

혼자 떠난 스페인 여행

세비야 여행 스케치북(1)

 2017년도에 6개월 정도 혼자 떠났던 유럽 여행 중에서도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33일간 머무르며 엽서 사이즈의 작은 스케치북 한 권을 가득 채운 여행 드로잉은 특별한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가끔 이 스케치북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세비야는 여행의 거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3개월은 몰타에서 머무르며 중간중간 이태리를 여행했고, 스페인에서의 3개월 중 한 달은 바르셀로나에서 보내고 마드리드와 근교, 코르도바를 지나 세비야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도착한 날은 세비야의 가장 큰 축제인 봄 축제가 막 시작한 날이었다.

 Feria de abril은 4월의 축제라는 뜻이지만 4월 말 ~ 5월 초 중 개화 시기에 따라 매년 일정이 다르다. 나는 5월 5일에 세비야에 도착했었고 세비야 전에 들른 코르도바에서도 파티오(patio 정원) 축제 기간이었는데,  축제에 참여하는 집은 정원을 아름다운 꽃들로 꾸미고 최고의 정원을 투표한다. 축제 지도에는 지난해에 우승한 집, 참여하는 집의 입장 시간, 입장료가 있는 집도 있으니 확인하고 방문해야 한다.

 코르도바에서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줄지어진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 세비야에 막 도착했을 땐 새파란 쨍한 하늘에 오래된 낮은 건물들 사이사이 연보라색 꽃나무가 가득하고 축제 기간이라 마차와 전통 복장을 한 사람이 지나다니는 모습에 과거로 와있는 듯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꽃나무가 한참 떠올라 찾아봤더니 ‘자카란다’라는 나무였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다음날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복장인 플라멩코 드레스를 입고 스페인 광장을 그렸다. 전통복장을 한 여행객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말을 걸기도 했다.

 스페인 광장은 같은 위치에서 여러 날에 걸쳐 완성했다. 어떤 날은 30분, 또 어떤 날은 1시간씩 그리고 그린 날짜를 그림 속에 함께 기록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묘사까지 할 때는 처음에는 원하는 구도의 사진을 찍고 스케치북에 연필로 전체적인 큰 구도를 먼저 잡는다. 그리고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그려나간다.

 오른손잡이는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그림을 그리면 손에 잉크가 묻어 번지는 걸 방지할 수 있고, 먼저 그린 그림이 손에 가려지지 않아 그리기에 훨씬 편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관찰하다 보면 보이지 않던 타일의 그림도 보이고 창틀에 있는 작은 식물도 보인다. 그냥 사진만 찍을 때 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날의 날씨와 만났던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 그때의 기억이 마치 영상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어떤 날은 공원에 앉아 책을 읽는 할아버지를 그렸다. 할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떠나셔서 이 그림은 미완성인 채로 완성되었다.

 여행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다 그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여행 드로잉 수업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미완성인 그림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진 않은지 물어보셨는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이후에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좀 더 들여다볼 수 있는 묵직한 질문이었다.

 다 그리지 못한 그때의 이유가 있었고, 그것 또한 그대로의 의미가 있어서 다시 돌아와서도 더 그리지 않고 그대로 두며 그때를 기억하고 있던 나를 알게 됐다.


 어느 날은 머물던 숙소의 주인아주머니께서 친구와 브런치 먹는 자리에 데려가 주셨고, 친구분의 손자를 연필과 색연필로 그렸다. 당시 프리랜서로 계약된 작업이 있어서 미술재료와 노트북, 스캐너까지 모두 들고 갔었고, 이 그림을 스캔받아 엽서로 만들어 선물로 드렸다.

 세비야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20분 정도에 위치한 ‘마이레나 델 알하라페(Mairena del Aljarafe)’라는 조용한 동네에 머물렀는데, 집주인 Angela는 미술을 전공하였고 큰 딸과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은 결혼하여 타 지역에 살고 막내아들은 세비야 도심에 따로 살고 있어 Angela는 혼자 살며 빈 방들을 셰어하고 나는 그중 한 방을 사용했었다.

  Angela의 친구분들이 초대해 준 자리에선 친구분께서 직접 디자인한 귀걸이를 선물 받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만난 다른 친구분의 댁에선 차도 마시게 되었는데 100년이 넘은 오래된 가족들의 유품들도 잘 보관해 두셔서 마치 박물관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역 화가로 활동하고 계신 분 댁에도 초대받았는데, 전통 음식인 직접 만든 가스파초와 해산물도 맛있게 먹고 작업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세비야에서 머무르는 기간도 길고, 근교를 여행할 땐 집을 비우더라도 짐도 보관해 둘 겸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교통편이 편한 곳을 선택한 건데 지나고 보니 여행에서 하게 되는 많은 선택지들 중에 가장 잘한, 럭키한 선택이었다. 집안 가득한 미술 서적들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고, 미술이라는 관심사가 같아 언어적인 소통은 어려워도 금방 가까워졌고 Angela의 많은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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