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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kArt Sep 11. 2020

Hola, Sevilla #33

열쇠

 피카소가 말했다. 그림은 일기를 쓰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론다에서 돌아와 세비야 터미널에 도착했고 세비야에서 33일간 머무르면서 스페인 광장을 수도 없이 들렀지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광장 끝 타워의 계단에 앉아 천천히 바라보았다.

마지막 날의 스페인 광장 야경

 세비야에서의 둘째 날, 나는 처음으로 스페인 광장에 왔었고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 옷은 아니었다. 나는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20분 정도에 위치한 ‘마이레나 델 알하라페(Mairena del Aljarafe)’라는 조용한 동네에 머물렀는데, 집주인 Angela는 세비야 최대의 축제인 La Feria de Abril 기간이니 전통 복장을 하고 축제를 즐겨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첫째 딸과 두 아들이 있는데, 딸의 오래된 플라멩코 옷들을 침대 위로 잔뜩 쌓아두곤 어울리는 장신구들을 권해주었다. 나는 암묵적으로 동행해 줄 거라 생각해 복장을 다 갖추고 따라나섰지만 Angela는 나를 광장에 데려다주고 마트로 떠났다. 일요일은 문을 닫으니까 서둘러야 한다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Ole를 외쳤고 처음엔 혼자 어색한 듯 눈웃음으로만 화답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쭙잖은 플라멩코 동작을 하며 함께 Ole를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스케치북의 첫 장은 처음 온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 복장을 한 채 벤치에 앉아 바라본 풍경으로 채웠다.  

 집 앞 카페에서 만나 함께 아침을 먹었던 Angela 친구의 어린 손자, 노을이 질 때 보면 더 아름다운 엘리자베스 다리, 맥주 한 잔을 시키면 넉넉한 타파스 한 접시를 주던 인심 좋은 그라나다의 레스토랑, 정말 여길 하루 만에 볼 수 있는 곳인가 싶었던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여행의 시발점이었던 피카소 생가,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말라가에서 머무르는 3일 내내 들렀던 호텔 루프탑 레스토랑, 계획 없이 잠깐 들르려다 하루를 더 머물렀던 유럽의 발코니 네르하까지.  
사나흘에 걸쳐 같은 곳에 앉아 그리기도 하고, 한 장소를 여러 번 그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스케치만 했던 작은 스케치북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오늘이 정말 마지막으로 보는 세비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다 한 그림을 마무리하기 위해 광장을 나왔다. 출입구 왼쪽에는 레스토랑이 오른쪽에는 타파스 집이 있는데, 레스토랑은 내가 지날 때면 어린아이의 생일 파티를 하는 가족들이거나 여러 친구들이 모여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느낌이랄까. 그곳에 가면 나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것 같아 항상 고민만 하다 타파스 집으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다.
또 언제 올지도 모른다.
비장하고 소심한 발걸음을 옮겼다.
문어 튀김과 맥주를 시키고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날의 그림은 그날 끝내지 않으면 대부분은 미완성인 채로 완성된다. 론다에서는 4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론다 다리가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에서 그리다 버스 시간에 맞춰 미완성인 채로 끝난 바위를 펜 선으로 채우고 있었다. 직원은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우와! 그거 론다야?”
“그라시아스. 응, 론다야.”
“나 다른 그림들도 봐도 돼?”
“물론이지.”
나는 스케치북을 건네주곤 맥주를 마셨다. 늘 그렇듯, 내 짧은 영어 탓에 우리는 간단한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으로 담는 여행지의 모습도 좋지만, 여행지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다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이게 된다. 그림으로 그리려면 하나하나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을 그리는 다른 여행자들을 만나기도, 호기심에 말을 거는 여행자를 만나기도 한다. 서로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스케치북을 보면서 다녀온 곳을 떠올리다 보면 여행이란 공통된 주제 덕분인 지 금방 친해지기도 한다.
 
고맙게도 Rogelio는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대답과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는 속도가 빨라지고 스케치북이 반쯤 지날 때, Rogelio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했다.
“이거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이다!”

얼굴로만 가득 채운 그림이었다. 그는 대머리, 반쯤 벗겨진 갈색 머리 남자 캐릭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테라스에서 론다의 누에보 다리가 보이는 집에서 머물렀는데, 그 숙소 테라스 사진을 보여주며 그곳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Rogelio는 이 스케치북을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되냐고 물었다.
이미 나는 약간의 취기가 오른 상태였고,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Rogelio는 레스토랑의 테이블을 누비며 보여주었고, 나를 향해 ‘저기 있는 애가 그린 거야’라는 듯 손짓하면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부응했다.
Rogelio는 내 자리로 돌아와 스케치북을 돌려주며 테이블 위로 하몽 한 접시와 맥주를 놓고 말했다.
“이건 내 선물이야! 그리고 오늘 먹은 음식은 계산하지 않아도 돼.”

나는 거절했지만 Rogelio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고 했다.
“오늘 내 생일이니? 고마워! 내가 보답으로 아까 그 캐릭터로 널 그려줘도 될까?”
그는 고맙다고 하며 사진을 갖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Rogelio의 손에는 증명사진 하나가 있었다.
“내 아들이야. 이 아이로 그려 줄 수 있어?”
“그럼! 우와! 축구 선수 같아 보여!”
나는 사진을 보며 말했다.
“정말? 내 아들의 꿈이야!”
Rogelio는 완성된 그림을 받으며, 혹시 내일 저녁에 다시 이곳을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왜? 나 내일 아침에 발렌시아로 가야 되는데…”
Rogelio는 하루를 더 보낼 순 없냐고 물으며,
“네가 그린 스페인 광장의 타워 옥상에 오를 수 있는 열쇠를 친구가 갖고 있는데, 나는 네가 그곳에서 세비야를 그리면 좋을 것 같다.”라고 했다.(스페인 광장은 현재 관공서로 2층까지는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발렌시아에서의 하루를 포기하고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무르면? 숙소를 먼저 예약해야 될까? 이틀 뒤에 예약된 가우디 성당 시간은 맞출 수 있을까? 하나를 얻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되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내 여행 비자는 이미 바닥나고 있었다.
나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고, 내가 세비야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 나를 기억해 줄 수 있겠냐고 말하며 증명사진을 돌려주었다. 그는 알겠다며, 내게 세비야에 오기 전에 연락하면 친구에게 미리 전달해 두겠다고 했다. Rogelio는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가 적힌 종이와 함께 증명사진을 다시 나에게 주었다.
나는 ‘이걸 왜 다시 나에게?’하는 표정으로 Rogelio를 바라보았다.
 
“이건 타워로 가는 열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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