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식으로 묻기

by 유진


바야흐로 중간고사의 시기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데,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올 해의 벚꽃은 중간고사는커녕 3월 첫 만남의 여운도 채 가시기 전에 스리슬쩍 왔다가 소리 소문 없이 떠나버렸다. 마치 일본 투어 가기 전에 하루짜리 일정으로 우리나라에 들러 ‘알러뷰 코리아’ 하고 떠나는 할리우드 스타 마냥.


고등학교 교사에게 1학기 중간고사 출제 기간이란 첫 시험 난이도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예민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숨 가쁘게 달려온 3월 뒤에 드디어 맞이한 여유를 상상하게 만드는 설렘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해는 봄꽃이 주는 살랑살랑함이 이미 지나가 버려서인지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어차피 고사 기간에 조퇴하고 갈 데도 없다는 무력감 때문인지 자꾸만 속도도 텐션도 축축 처졌다.


1번부터 5번까지 답지 다섯 개를 채워 넣느라 머리를 쥐어뜯다가, 객관식 질문과 주관식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 대해 평소엔 하지도 않았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교사든 학생이든 닥친 일이 있을 때는 늘 이렇게 망상의 나래가 활짝 펴지는 법이니까.






수업 준비를 하고 지필고사 시험문제를 내다보면 객관식으로 묻는 일이 훨씬 더 까다롭다는 걸 느끼게 된다. 적절한 답이 명확하게 존재해야 함은 물론이고,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매력적인 오답’ 또한 한두 개 포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 눈에도 ‘에이 이건 아니고’ 싶은 답지 또한 슬쩍 끼워 넣어 줘야 적당하고 괜찮은 문제가 된다.



이렇듯 까다로운 출제 과정임에도 객관식 질문이 좋은 이유는 답변하는 사람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던진 선다형, 배합형의 질문은 학생이 어디까지를 명확히 알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주춤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몰라요’라고 적혀있거나 하이얀 백지로 돌아온 주관식 답안은 알려주지 못하는 귀중한 정보가 객관식 오답에는 있다.

'3번을 고른 걸 보니 이 부분이 헷갈리는 거로군? 그렇다면 다음 수업은 이것이다!'처럼

질문 이후를 구상하기 위한 구체적인 힌트 또한 넌지시 건네준다.



수업 마무리에서 내용 확인을 위해서 주로 쓰는 진위형 질문은 답하는 사람이 가진 확신의 정도까지도 엿보게 한다. O 또는 X를 얼마나 자신 있게 외치는지, 내가 던진 질문의 끝과 학생이 뱉는 답변의 시작 사이에 떠오르는 침묵의 시간을 보면, 학생이 얼마나 명확하고 자신 있게 이 질문에 답하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법이다.



어찌 보면 그냥 툭 던지는 서답형 질문은 게으르다.

나만 해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몰라요', '싫어요' 해버리고 싶어 지곤 하니까. 정답이 아니면 빵점이 되어버리는 주관식 문제를 내놓고 '왜 대답 안 해주는 데에~~~?? 뭐라도 써봐, 응? 낸 사람 성의가 있잖아' 하는 건 친절한 척하는 강압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진짜로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면 '다음 중 가장 적절한 것은?' 하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청소년에게 마음을 묻는 일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요즘 어떠냐는 물음, 오늘 뭐가 즐겁고 행복했냐는 질문이 힘겨운 때가 있다.

나에게 가져주는 관심과 애정이 고마우면서도 버거운 그런 시간, 속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마음을 어딘가 풀어내고는 싶은데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일상적인 일들은 무거운 책임감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간이.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이, 더 정확히 말하면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나만 내다볼 수 있는 창을 내어 평온히 앉아있고 싶은 순간들이 나에게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애정 하는 청소년이 나를 피해 숨고 싶어 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어쩔 줄을 모르겠다.

괜히 당황하고 서운해서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데?’ 하고 주관식으로 답을 내놓으라며 채근을 했던 많은 날들을 고백한다.



그치만 이제는 안다.

수업자료를 열심히 보고 문제를 잘 구조화해야 알 수 있는 학습의 상황만큼이나,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촘촘히 고민해야 알아챌 수 있는 마음이란 게 있다는 걸.

'대체 무슨 일이야? 뭐가 문제니?'라고 물을 땐 스스로도 파악할 수 없던 마음이,

'혹시 이런 기분이야?' '이 중에 어떤 마음일까?' 하고 물었을 때 명료해지기도 한다는 걸.







첫 담임을 하던 해에 우리 반에는 코뿔소처럼 모든 걸 들이받고 다니던 학생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랬어?’, ‘지금 마음이 어때?’....

내가 가진 모든 창의력을 동원해 질문의 모양을 바꿔보아도 대답은 늘 ‘아 짜증 나요!’, ‘빡치는데 어쩌라고요’를 넘어서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서툴던 시절의 나는 결국 질문을 포기했다. 한바탕 들이받고서 본인도 만신창이가 되어 오면 핫초코를 타 주고 옆에 가만 앉아서 그냥 함께 마음을 달래는 것으로 할 일을 대신했다.

그렇게 1년을 함께 "버텼다".



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었단 걸 깨달은 건 그다음 해였다.

나와 친한 동료 쌤의 담임 반으로 배정받은 그 학생은 조금은 덜 빈번하게, 그러나 여전히 자주 코뿔소가 되어 교무실로 소환되었다. 그 학생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쌤이 던지셨던 질문을 기억한다.



“자, 00아. 이 중에 지금 마음이랑 가장 비슷한 걸 골라봐. 아니면 가장 큰 것부터 순위를 매겨도 좋아.

1번 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친구들이 몰라줘서 서운하다,

2번 나만 미워하는 것 같아서 억울하다,

3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는데 자꾸 말을 시켜서 귀찮다.”



더 신기한 건 그 학생이 술술 대답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랬다. 짜증 나고 빡치는 감정의 기저에는 서운하고, 억울하고, 귀찮은 감정이 있는 거였다. 스스로 말할 언어가 부족했을 뿐, 선택지를 주면 명확히 이거라고 집어낼 수 있는 마음이 분명 거기 있는 거였다.






그때 처음, '싫어요. 필요 없어요. 어차피 의미도 없는데요, 뭘.' 같은, 청소년이 흔히 가진 시니컬함 뒤에 담긴, 사실은 그보다 더 간절하고 깊은 마음을 읽어내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보다 진폭이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래서 때론 내 마음 하나 건사하기가 참 힘든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더 믿어보고 싶어 졌던 기억이.



객관식 23개 주관식 8개짜리 중간고사 시험문제를 내다가 그때를 떠올리곤, 나른하고 늘어지던 텐션이 빠르게 차올랐다. ‘아, 이번 주도 지치지 않고 부지런히 사랑해야지, 부지런하게 구조화된 질문을 던져야지, 객관식부터 차근차근!’ 하고 막연한 다짐을 했다.

그리고 일단 지금은 중간고사 출제를 마무리해야겠다. 이 또한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2021.04.24.)




+)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를 읽고서 떠오른 이야기들을 적었어요.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14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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