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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Aug 24. 2024

쁘리벳! 윤지

사춘기 소녀와의 성장기

  “선생님, 아까 어떤 언니가 왔다 갔어요.” 잠깐 과학실에 다녀온 사이, 책상에 볼록한 봉투가 놓여있다. 겉면을 자세히 봤다. 윤지가 다녀갔구나. 윤지는 작년에 우리 반 1학기 여자 회장이었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늘 바른 자세로 수업을 듣던 모습이 떠올랐다.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체육도 잘해 성별에 상관없이 인기가 많았다. 공부는 물론이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발표도 잘했었다. 전교 부회장으로 출마했을 때도 연설문을 스스로 작성하고, 야무지게 선거 준비를 하더니 5학년 대표로 당선됐었다. 윤지는 완벽해 보였다.


  그러던 윤지가 작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을 피했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잠자코 지켜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마음속 이야기를 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공통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과제를 주 2회 내주곤 했다. 그녀는 그 공책에 주제글 대신 자신의 고민을 적어 냈다.


  방학에 친한 친구 4명과 생일 파티를 하려고 모였었는데, 윤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까지 자신과 놀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무리에서 이유 없이 자기를 따돌려 괴롭다는 내용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해 보였던 윤지에게 이런 고민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고학년 여자아이들에게 교우 관계는 무척 예민한 문제이다. 관련된 아이들이 모두 우리 반이었으니 나는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자칫하면 서로 감정이 틀어지고 서운할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나는 우선 힘든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그동안 아주 고통스러웠을 텐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답을 적었다. 그 이후로 숙제를 핑계 삼아 윤지와 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공유했다.


  하루는 윤지가 친구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연락해도 받지 않는다며 나와 함께 상담하고 싶다고 적었었다. 그래서 나는 자료 정리를 도와달라는 구실로 그 아이들을 따로 불렀다. 일을 마치고 둘러앉아 간식을 주면서 요즘 서로 잘 지내는지 물었다. 그때 윤지가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친구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신 설명하더니 그 아이마저 울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각자 한 명 한 명은 모두 좋은 친구인데 서로 속상한 일이 있었구나, 하며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쌓인 오해를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장통을 겪고 있는 윤지 옆에서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시간을 잘 흘려보낼 수 있게 함께 통증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나는 윤지에게 조금 떨어져 지내보는 게 좋겠다고, 너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으니 다른 친구를 사귀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노트에 적었다. 윤지도 이제 뾰족한 친구들에게 지쳐서 다른 친구와 놀고 싶다고 했다. 마침 자리를 새로 바꿔야 했다. 평소에 윤지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던 서연이와 같은 모둠으로 배치했다. 그 뒤로 둘은 단짝이 되었다.


  고민이 해결된 후에도 비밀 노트는 이어졌다. 주로 윤지가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 기억에 남는 여행지, 인생의 좌우명 등이었다. 나는 답을 적기 위해 다른 과제 검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했다. 하지만 윤지의 질문 덕분에 분주한 업무를 잠시 멈추고 나는 돌아보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잠시 쉴 수 있었다. 윤지가 낸 난센스 퀴즈에 웃기도 하고, 학창 시절에 친구와 몰래 쪽지를 주고받았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작년을 떠올리면서 오랜만에 윤지가 준 편지를 꺼내 읽었다. 곧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떠난다고 했다. 4년 후에나 돌아올 계획이라고 쓰여 있었다. 빽빽하게 적은 내용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년에 친구 때문에 매우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큰 문제로 여겨지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성숙한 문장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선생님의 가슴을 짓누르는 그 문제도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오히려 내게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떠나면서 내게 무슨 선물을 할지 고민하다가 네 잎클로버가 달린 금빛 책갈피를 골랐다고 했다. 청탁금지법에 따르면 교사는 학생에게 금품을 받으면 안 된다. 나도 여태까지 모두 거절해왔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도 윤지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파란 하드 커버에 보람줄이 달린 꽤 두꺼운 다이어리를 골랐다. 그리고 집에 있는 달러를 모아 비닐에 넣어 표지 안쪽에 붙였다. 직접 전달하면 윤지의 담임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6학년 수업에 들어가는 선생님에게 윤지 책상에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윤지가 마지막으로 등교하는 날, 우연히 학교 현관에서 마주쳤다. 윤지가 담임 선생님을 따라 줄을 맞춰 이동하는 중이라 오래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물을 받았냐는 나의 손짓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포옹하면서 눈물이 비쳤지만 우리는 밝게 웃었다. 아이는 앞 친구를 따라가면서도 뒤를 계속 돌아보며 내게 손을 흔들더니 사라져 갔다. 파란 공책의 맨 끝에는 편지를 적어 두었다.


  “쁘리벳(러시아어로 안녕)! 윤지, 선생님은 네가 멋지게 이겨낼 줄 알았어. 러시아에서도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빛내리라 믿어.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은데, 넌 13살에 벌써 깨우치다니… 우리 윤지는 역시 천재인가 봐! 모스크바에서 힘든 일 있으면 이 공책에 털어놓도록 해. 더 이상 내가 답을 해줄 수는 없지만, 적다 보면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네 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 이래. 너의 행운과 행복을 모두 빈다.”


  나는 초록색 펜으로 네 잎클로버와 세 잎 클로버를 정성껏 그려 넣으며 마지막 답장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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