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영진이 울어요.” 점심시간에 양치하고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몇몇 아이들이 나를 쫓아오며 속삭였다. 나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눈으로는 영진이를 찾았다. 아이는 교실 뒤편에 뒤돌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진이는 우리 반에 몇 안 되는 얌전한 남자아이다. 그래서 여자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다. 누구와 물리적으로 싸울 아이가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영진아, 무슨 일 있었니?” 눈이 벌게진 영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 영진이는 고개를 돌려 사물함 위에 걸쳐진 팔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니?”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영진이는 등허리를 구부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말하고 싶을 때 얘기하자. 세수 좀 하고 올래?” 아이의 오른쪽 어깨를 토닥이며 제안했다.
영진이가 교실 밖으로 나간 사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영진이가 왜 우는지 아는 사람?” 몇몇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고, 개구쟁이 선규와 민찬이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영진이가 준비되면 같이 이야기하자고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가 아이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한결 맑아진 얼굴로 돌아온 영진이가 내게 왔고, 선규와 민찬이도 불러 함께 모였다.
괜히 울진 않았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영진이에게 물었다. 보드게임을 기다리다가 빈자리가 생겨 앉았는데, 자기가 오자 선규와 민찬이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다른 것 한다며 가버렸다고 했다. 선규와 민찬이는 뭘 이런 것 가지고 우냐며, 입이 부어있었다. 영진이는 친구들이 자기를 피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을 테다. 선규와 민찬이를 일방적으로 나무라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친구가 울어서 너희도 놀랐지?” 나는 선규와 민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둘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당황스러웠을 거야. 너희도 상처를 줄 마음은 없었을 텐데, 영진이가 우니까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 최대한 혼나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부드럽게 전했다.
“네, 맞아요.”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영진이가 아주 속상했나 본데 먼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나의 부탁에 선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같이 놀려고 왔을 때 가버려서 미안해. 나였어도 기분 나빴을 것 같아. 앞으로는 같이 놀자.” 선규는 영진이를 바라보며 차분하면서도 천천히 말했다. 나는 먼저 그렇게 말해줘 고맙다고 했다. 영진이도 자기가 예민했던 것 같다고, 이제 괜찮다고 했다. 셋은 어깨를 펴고 같이 놀잇감을 챙기러 갔다.
서른 명 가까이 생활하는 교실에서 다툼은 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학기 초에 자기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나 전달법’과 ‘인정·사과·약속’의 과정으로 진정성이 느껴지는 구체적인 사과 방법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그래도 갈등은 곳곳에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건을 해결하는 마법의 말은 진심을 담아 전하는 ‘미안해’였다. 그래서 이 매직 워드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미안(未安)하다.’는 한자를 풀어보면 부정을 의미하는 未(아닐 미)와 安(편안할 안)을 합친 말로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뜻이다. ‘편안하다’의 반대말은 ‘불편하다’ 또는 ‘불안하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글자를 풀어보니 ‘미안하다’도 그 상대어로 새롭게 여겨졌다.
첫 글자인 미(未)에는 ‘아직’의 의미도 들어있다. 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마음 편해지라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면 그제야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는 바람도 담겨있는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아 어딘지 자존심이 상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그것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낱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나니 ‘미안하다’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권하기도 쉬워졌다.
“얘들아, 미안한데 오늘 미세먼지가 심해서 5교시 운동장 체육은 못해.” 내 말에 아이들은 동시에 뿌연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녀석들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 대신 이번 수학 시간에 교실에서 풍선 배구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선규와 민찬이가 앞장서서 책상을 벽으로 민다. 영진이는 바닥에 드러난 쓰레기를 소리 없이 줍는다. 작은 운동장으로 변신한 교실에 우리 반 모두가 웃으며 옹기종기 모였다. 이제야 내 마음이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