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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Aug 31. 2024

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고맙다 인사하면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안 돼요.”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여자 주인공 동백이는 기차역 앞 벤치에 앉아 자신의 꿈은 철도청 직원이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저 분실물 보관소에 앉고 싶다고 엄지로 가리키며 얘기한다. ‘미안하게 됐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고맙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그래서 어떤 기분일지 알고 싶다고.


  나도 일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영훈이는 보드게임 ‘루핑루이’를 하다가 건전지가 다 닳아 느려진 비행기가 답답했다. 내가 다가가 십자드라이버로 나사를 풀어 새 건전지로 갈아주자, 선생님은 이런 것도 할 줄 아냐고, 손뼉 치며 감사하다고 했다. 소희는 점토로 빚은 헬로키티의 빨간 리본이 떨어져서 울상이었다. 서랍에서 목공풀을 꺼내 주니 두 손으로 받으며 고마워했다.


  더운 여름에는 교무실 냉장고에 유성펜으로 ‘5-3’이라고 적은 물통을 넣어둔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땀 흘리며 헉헉대는 아이들에게 시원한 물 마시고 싶으면 물병 들고 나오라고 한다. 그러면 금세 내 앞에 긴 줄이 생긴다. 아이들은 물을 받아가며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웬일로 주환이가만히 앉아있다. 물통이 없서였다. 그냥 오라고 손짓하고 내 컵에 물을 따라주니, 어두웠던 얼굴이 환해지며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30번쯤 듣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아마 동백이가 교실을 들여다봤다면 그녀의 꿈은 선생님이었을지도 모른다.


  신규 발령을 받았을 때 옆 반 선생님이 3학년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고마워’라고 일일이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선배의 좋은 습관을 나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에게 의식적으로 고맙다고 표현하려 해 왔다. 맨 뒷줄에 앉은 아이가 활동지를 걷어오면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수업을 마칠 때 잘 들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이 밖에도 내가 고마워한 적은 많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맙습니다’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 쪽이다. ‘고맙다’ 시합이 있다면, 아이들이 분명 우승이다.


  학기를 마치고, 새로 발령받은 학교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러 빈 교실에 들렀었다. 그런데 교실 문 앞에 메모가 두 장 붙어 있었다.


  ‘선생님 있나 와 봤어요. 2월 4일 11시 28분에 왔다 감’, ‘오늘도 안 계시네요. 선생님 언제 오세요? 2월 7일 2시 20분에 왔다 감’


  우리 반 윤서가 방학인데 여러 번 다녀간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생님은 2월 13일에 근무하러 올 거야. 2월 9일 10시 30분에 씀’이라고 쓴 쪽지를 붙여뒀다.


  근무일 아침에 교무실로 출근하자마자 교실에 올라가 봤다. 문에는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


  ‘선생님 진짜 답장을 주셨네요! 2월 13일에 꼭 만나요!’


  설마 했는데 윤서가 내 답장을 본 것이었다. 몇 시간 후 윤서는 나를 찾아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초콜릿과 젤리, 그리고 홍삼액이 서너 병 들어있었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인데 너희 주는 것이라고, 이 젤리는 시험 잘 보게 하는 마법의 젤리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며 나눠주곤 했었는데, 똑같은 간식을 구한 것이었다. 나는 인삼이 그려진 갈색 병 하나를 집어 이런 건 어디서 냐고 물으니, 할머니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께 혼났겠다고 하니, 괜찮았다며 윤서는 수줍게 웃었다.


  이제 선생님 진짜 못 오니까 헛걸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아이를 안아주었다. 퇴근 후 저녁에 집에 와보니 윤서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선생님, 저에게 좋은 기회 주시고, 즐거운 추억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내게 주기만 한 윤서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분명 나인데, 아이는 오히려 먼저 감사를 표했다. 내게 ‘고맙습니다’를 제대로 가르쳐 준 선생님은 윤서였다.


  작가 림태주의 저서 <그리움의 문장들>을 보면 ‘고맙습니다’는 ‘고마’와 ‘같습니다’가 합쳐진 말이다. 여기서 고마는 곰을 일컫는데, 곰은 대지를 관장하는 신으로 추앙받는 신령한 동물이다. 그래서 ‘고맙습니다’는 ‘당신은 대지의 신처럼 은혜로운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윤서의 눈으로 바라보면 주위에서 곰 같은 존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에게 물질과 마음을 ‘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게서 비롯 것을 기꺼이 받아 ‘주는’ 많은 이들.   

  

  모두 내겐 ‘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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