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없잖아!” 3월 2일 새 학년 첫날 아침, 복도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밖으로 나가보니 할머니와 손자가 실랑이하고 있었다. 아이 이름은 이수찬. 전달받은 가출석부에 전학 예정으로 적혀있어서 환영 판과 자리 배정표 명단에서 제외했었다. 선생님이 깜빡하고 빼놓아서 미안하다고, 우리 반이 맞다고 손을 잡아도 아이는 뿌리치며 교실 뒷문을 잡고 발버둥 쳤다.
간신히 달래서 자리에 앉히자 교과서를 꺼내더니 박박 찢어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색연필을 일일이 꺼내 집어던지고, 연필심으로 책상을 내리찍으며 씩씩거렸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교문까지 인솔했다. 그런데 수찬이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며 집으로 갔다. “선생님은 마이너스 550점이에요.”
이제 막 2학년이 됐는데 마이너스와 세 자릿수를 알다니, 수찬이는 영특했다. 그 뒤로도 녀석은 궁금하지도 않은 나의 점수를 꾸준히 알려줬다. 마이너스 700점, 마이너스 1,500점, 마이너스 5,000점.... 녀석의 수 개념이 향상될수록 점수는 더욱 처참해졌다. 그도 그럴만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는 아이의 물건(심지어는 의자나 내 책상 위의 것도 던졌다.)을 가져가고, 도망가서 숨으면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았으니.
교실에는 수찬이 말고도 나의 손길이 필요한 31명의 꼬마들이 더 있었다. 나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도록 모두를 보호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아이는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수찬이는 늘 잔뜩 울분에 차 있었다.
할머니와의 통화 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수찬이 어머니는 4년간 암 투병을 하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기였을 때는 밝고 순했었는데 어머니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불안 증세를 보였다고 하셨다. 취학 후 폭력성이 두드러져 ADHD 진단을 받고 작년 1학기에는 약물치료를 했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가족 모두 힘드셨겠네요. 그런데 왜 치료를 중단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수찬이 애비가 왜 애를 정신병자 만드냐고, 병원에 못 가게 해서 관뒀지요.” 할머니께서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 아드님께서 치료를 반대하셨군요.”
“수찬 애비요? 아들 아니에요. 제 사위예요.”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수찬이 아버지는 직장이 있는 인천에서 지내시고, 수찬이는 할머니와 산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친할머니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랜 기간 간병한 딸을 떠나보내고 손주를 키우고 계셨다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드셨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번에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내려고 했었는데,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데리고 있기로 하셨다고.
나는 수찬이의 치료를 위해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할머니의 양육 방식에 불만을 내비치셨다. 나는 증상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을 위해 수업 참관을 권했다. 수찬이는 처음으로 아빠가 학교에 온다며 좋아했다. 아버지는 휴가를 내고 직접 교실에 와 보시고아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이후 치료에 동의하셨다.
며칠 후 효과가 나타났다. 친구들과 대화도 가능해지고, 바닥에 누워있던 아이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수찬이는 만들기를 좋아했다. 특히 종이접기를 잘했다. 우리는 방과 후에 간식을 나눠 먹으며 같이 받아쓰기도 하고 비행기도 접었다. 그러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수찬이는 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선생님, 저기 우리 엄마가 있어요.” 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잘 지낸다고 인사드리고 이리 와.” 나는 일부러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예뻤어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진짜 잘 그리고, 못 하는 게 없었어요.” 녀석은 내게 다가오며 어깨를 으쓱했다.
“수찬이 보면 정말 그러셨을 것 같아. 그런데 수찬아, 엄마가 돌아가셨어도 수찬이가 엄마의 사랑하는 아들인 건 변함없어.” 나는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맞아요. 여기에 엄마가 있어요.” 수찬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같이 극장에 간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어벤저스(Avengers)가 인기였다. 수찬이는 나와 단둘이 영화를 보고, 피자도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웃으며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어둡고 시끄러운 환경이 낯설었는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언제 끝나는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 질문은 5분마다 반복되었다. 아이를 낯선 환경에 데려온 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부제로 ‘인피니티 워(infinity war)’가 붙은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내겐 ‘인피니티 워’였다. 결국 중간에 팝콘을 들고 밖으로 나와 식당에 갔다. 아이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 생겼다며 피자를 입안 가득 넣고 행복해했다.
수찬이는 하교할 때 내게 그날의 점수를 560점, 2,800점, 8,700점, 75,860점 하고 붙여주더니 언제부터인지 더 이상 매기지 않았다. 그 대신 하트모양으로 접은 편지를 건넸다. 쪽지를 펼쳐보면 멜로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달콤한 고백이 담겨있었다. 연애할 때도 들어본 적 없던 사랑의 언어를 수찬이에게 원 없이 들었었다. 수찬이가 나를 쳐다볼 때면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게서 떠나간 엄마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에게 해주고 싶던 말을 내게 전한 것이었다.
종업식 날에 수찬이는 서럽게 울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보다 더 꺼이꺼이 울부짖었다. 그런 녀석을 안아주며 나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수찬이가 인천으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천사라고 불러주던 수찬아!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금도 어린 사슴 같던 너의 눈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선생님이 옆에 없어도 그곳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렴.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꼭 다시 만나자.”라고 하늘에 계신 그분을 대신해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