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가볍다. 엉덩이가 가볍다.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도 분주하다. 시험을 볼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지우개가 없으면 손을 들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서랍에서 지우개를 찾고 있으면, 선우가 부리나케 지우개를 놓고 간다. 쉬는 시간에 준비실에서 자료를 복사하고 양손에 짐을 들고 있으면, 녀석은 언제 왔는지 밖에서 문을 열어준다. 체육부장인 선우는 나의 지시에 따라 잽싸게 경기장을 만들고, 활동이 끝나면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해 놓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늘 웃으며 군말이 없다. 오히려 운동도 되고 좋다며 깡동깡동 뛰어다닌다.
입도 가볍다. 내 주위를 맴돌다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는 “얘들아, 우리 다음 시간에 속담 게임 한대!”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려 째려보면 멈칫하고는 “아 맞다. 선생님이 못 본 척하랬는데....”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더운 오후, 달리기 한 아이들에게 내가 얼음과자를 하나씩 나눠주면, 아이들은 제 입에 넣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선우는 선생님도 드시라고, 두 개 드시라고 한다. 그제야 나도자리에 앉아 땀을 닦으며 시원한 맛을 느껴본다.
도윤이는 무겁다. 매사 진중하고 신중하다. 주말 잘 보냈냐는 일상적인 질문에도 곰곰이 생각하다 조심스레 입을 뗀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도윤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 전부터 친구와의 갈등으로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도윤이는 웃을 때움푹 패이는 볼우물이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도윤이의 표정이 어둡고, 종종 날이 서 있는 것 같아 걱정하던 터였다. 속상하셨겠다고, 아이들과 대화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축 처진 어깨로 느지막이 등교한 도윤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도와주냐고 하니, 우선 혼자 힘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기다렸다. 그런데 2교시에 아이가 엎드려 있었다. 괜찮냐고 물으니,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친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두통이 생긴 것이었다. 내가 나설 차례였다. 쉬는 시간에 다 같이 모여 오해를 풀고 서로 사과도 했다. 다행히 도윤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인지 조퇴했다. 가방을 메고 혼자 교실을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체육관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갔다. 그런데 선우는 나를 따라 교실로 들어왔다. 방과 후 수업이 있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선우는 도윤이랑 친하지?” 나는 사탕을 건네며 물었다.
“네, 그럼요. 저랑 도윤이랑 옆 동이예요. 그래서 집에 갈 때 같이 가죠.” 아이는 사탕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도윤이가 속상할 때 먼저 이야기하기도 하니?” 나도 자리에 앉으며 질문했다.
“아니요, 그러진 않아요. 제가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면 그때 말해줘요.” 녀석은 사탕을 감쌌던 비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도윤이가 힘들어 보이면 네가 먼저 물어봐 줄래?”
“네, 그럴게요. 제가 또 도윤이 기분이 어떤지 얼굴만 딱 봐도 알거든요. 음, 이렇게 웃는다. 기분이 좋다. 이렇게 무표정하다. 기분이 그저 그렇다. 입이 이렇다. 기분이 안 좋다.” 녀석은 양손 검지를 세워 볼의 가장 도톰한 부분을 짚었다가, 입꼬리를 내리기도 하면서 도윤이 흉내를 냈다.
“하하, 선생님이 지쳤었는데 우리 선우 덕분에 웃음이 나네. 도윤이가 요즘 많이 힘든가 봐. 그런데 내 얘기 들어주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학교 올 맛이 나잖아.” 나도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메말랐던 혀의 표면에 단물이 스몄다.
“그럼요.” 선우는 불룩해진 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깃털은 부유(浮遊)하지만 새는 자유(自由)하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다. 우리 안에도 시원한 바람을 담고 있어야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다.
입안의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선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 충전도 되고 바람 충전도 됐다. 선우 옆에 있으니 나도 새처럼 가벼워진 것이다. 아마 도윤이도 선우와 집에 가며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무겁게 짓눌렸던 마음에틈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예리한 칼날 대신 순하게 펄럭이는 날개가 돋아, 고민을 훌훌 털고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쪽이 사탕인지 맞혀보라고 하면서 선우는 양쪽 볼을 동시에 뿔룩였다. 나는 검지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틀렸다. 녀석은 왼쪽에 있던 노란색 사탕을 빼꼼 보이며 나를 놀렸다. 그러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며, 컴퓨터 수업에 늦겠다며 서둘러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