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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Dec 07. 2024

고유한 자유인

  ‘점심시간에 자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됨’


  새 학년이 시작하는 3월 첫 주의 우리 반 원칙이다. 친구 관계는 학기 초 점심시간에 결정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2~30분 여유가 있는데, 그때 놀면서 무리가 정해진다. 20여 년간 독자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 타당성이 검증됐다. 그래서 올해 3월의 첫 점심시간에도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대부분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 분단의 준서, 2 분단 지윤이, 3 분단 유이가 띄엄띄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돌아다니며 불러 모아 바닥에 둘러앉았다.     


  “너희 ‘펭귄 파티’할 줄 아니?”라고 내가 묻자,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카드를 나눠주며 게임 규칙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귀를 쫑긋하고 설명을 듣더니, 금방 이해했다.    

  

  “이번에는 준서 차례야.” 나는 카드 더미를 준서에게 넘겼다. 녀석은 경쾌한 속도로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놀이에 몰두했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도 누가 앉아 있나 살폈다. 그런데 지윤이만 제 자리에 앉아 혼자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놀고 싶냐고 묻자, 가만히 있었다. 나는 같이 놀자고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모여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펭귄 파티’를 보여주자, 어떻게 하는 것이냐며 흥미를 보였다. 지윤이가 방법을 알고 있으니 같이 하라고, 카드를 쥐주며 친구들 사이에 앉혔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지윤이가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놀고 싶지 않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믿지 않았다. 놀고 싶지만, 수줍은 마음에 책이나 그림 뒤로 숨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윤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보였다. 그림을 그리는 표정이 밝고 평화로웠다.


  3월 한 달간 꾸준히 아이를 관찰했다. 가끔 친구들과 놀기도 했지만, 혼자 자신의 그림 공책을 채우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내가 같이 놀자고 하면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했다. 과제를 낸 사람나의 꼬임에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컴퓨터실에서 보고서 제출이 늦어지면, 괜찮으니 천천히 하라고 나는 옆에서 기다렸다. 그러면 대충 낼 만도 한데 허투루 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했다. 같이 복도를 걸어가며 주말에 뭐 했냐고 물으면 단답형으로 다. 묻는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이에 아직 투명한 막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등교할 때 내가 업무를 하고 있으면, 지윤이는 내가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수업 시간에도 조용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언제 질문해도 작은 목소리로 정확 했다. 개구쟁이들 때문에 정신없다가 맑은 얼굴로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윤이를 보면 시냇물을 마신 것처럼 내 마음이 차분하고 시원해졌다. 런데 말수어도, 글은 수다스러웠다. 내가 정해 준 주제에 한 생각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글쓰기 공책에 가득 적었다. 내가 알던 얌전한 지윤이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3월 말에 지윤 어머니께서 상담 신청을 하셨다. 친구 관계를 걱정하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지윤이 같은 아이를 싫어할 친구는 없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요. 스스로 정한 기준대로 적절하게 행동하며, 안전한 친구들과 잘 놀아요. 종종 혼자 있을 때도 있지만 편안해 보여요. 지윤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저는 저와 아이와의 관계에 신경 쓰려고요.”


  6월에 지윤이는 일본으로 체험학습을 갔다 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윤이에게 물었다.  

   

  “여행은 재미있었니?”

  “네, 디즈니랜드가 좋았어요.”

  “선생님은 붐빌 것 같아 안 가봤는데, 어땠니?”

  “사람은 무지 많았는데, 그래도 정말 가볼 만해요. 특히 ‘미녀와 야수’는 정말 잘 만들었어요.”

   지윤이의 경계심이 느슨해져 대화가 여러 번 오갈 수 있었다.


  며칠 전, 영어 선생님께서 영어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이 다퉜다고 했다. 문 앞에 준서와 지윤이가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었다. 게임을 하는데 몇몇 애들이 불공평하다고 영어 선생님께 항의했다고 준서가 말했다. 다른 일은 없었냐고 묻자, 이번에는 자기가 얘기하겠다며 지윤이가 내게 재잘재잘 설명했다. 사실 내게 지윤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지윤이가 내게 수다스럽게 떠들고 있다는 게 흥분돼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의 관계 촘촘해진 것 같았다.


  2학기인 지금도 지윤이는 종종 혼자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가 본 아이들은 대부분 고독을 참지 못다. 혼자 있으면 초조해하고, 친구가 떠날까 집착다. 어른도 그렇다. 그래서 상대가 나의 에너지를 빼앗는 뱀파이어 같은 존재인 것을 알아도 끊어내지 못한다. 지만 지윤이는 아니었다. “저는 혼자도 괜찮아요.”라는 아이의 말을 이제는 믿는다. 모든 아이가 늘 친구와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나의 편견이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관계를 맺는 이유는 그게 좋아서가 아니라 혼자 남는 게 두려워서다. 고독은 뛰어난 정신을 가진 자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윤이는 이미 담담하게 고독이라는 특권을 누리며, 고요하고도 고유한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서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하고도 순한 빛이 났다. 눈이 부시지 않으니, 눈이 찌푸려지지도 않았다. 따듯한 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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