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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Nov 30. 2024

욕먹었을 때 읽는 약

  “아 씨 수학 싫다는데 왜 가르치고, 지랄이야?” 수학 익힘책을 풀어오라고 하자 현수가 연필 양 끝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더니 두 동강 내며 소리쳤다. 이제 학생들의 욕에는 어느 정도 단련됐다. 그래서 나름의 기준도 생겼다. 우선 혼잣말이거나 다른 아이들이 못 들은 것 같으면 그냥 넘어간다. 아니라고 발뺌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욕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한다. 그럴 땐 모욕을 당해 수치스러워도 수업은 끝내야 하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피해자인 내가 조사부터 판결, 후속 지도까지 직접 나서야 하는 해결 과정은 길고 고되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선배는 내게 이렇게 조언했다.      


  “너희 반의 1/3은 널 좋아하고, 1/3은 널 싫어하지. 그리고 나머지 1/3은 누가 담임이든 상관없을 테고. 네가 어느 반을 맡든 이게 기본값이야.”    

 

  그 말이 맞다. 1/3은 당연히 날 싫어한다는 것을 전제하니 더 이상 왜 싫은지 묻지 않고, 그 마음을 되돌리려 노력하지 않게 됐다. 이유 없이 욕받이가 되는 것도 더 이상 억울하지 않다(죄 없는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던가). 그냥 세상 이치일 뿐이다.


  욕을 직접 듣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듣기도 한다. 어느 날, 윤서 어머니가 할 얘기가 있다며 찾아오셨다. 수정이가 윤서를 싫어해 친구들에게도 윤서와 놀지 말라고 얘기했단다. 그래서 애들이 수정이 눈치를 보며 윤서를 멀리하고, 윤서는 왕따로 괴로워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얼마 전 심장병 진단을 받고, 수술 전에 내게 부탁하러 오신 것이었다. 걱정 말고 치료 잘 받으라고  말씀드린 후, 수정 어머니께 연락했다. 상황을 설명하니 우선 사과하셨다. 그런데 수정이 말도 들어봐야겠다며 전화를 끊으셨다. 찜찜했다. 다음 날 아침, 수정 어머니께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런데 어제와 목소리가 달랐다. 아이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 게 잘못이냐며, 이런 일로 유난 떠는 그 엄마 인성이 문제라며 내게 다다다다 역정을 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냥 잠자코 윤서 엄마 대신 오래 욕을 들었다.


  욕 경력이 쌓이니 욕을 듣는 자세에 대한 생존 철학이 생겼다. 첫째, 욕하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개는 경계심이 높고 공포심이 클수록 무섭고 사납게 짖어댄다. 사람은 고통이 크고 약점을 숨기고 싶을 때 말이 거칠어진다. 그는 내가 모르는 고통을 겪었거나 겪는 중일 수 있다. 수학 시간에 욕을 했던 현수는 악명 높은 수학학원에 다녀서 문제를 못 풀면 밤 10시까지 잡혀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수학이라면 진절머리가 난 것일 수도 있다. 수정 어머니는 나와 통화한 후, 퇴근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그러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거냐며 자신의 탓을 하는 남편과 밤새 부부싸움을 했을 수도 있다. 내가 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수정 어머니도 윤서 어머니가 투병 중인 것을 알았다면 반응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욕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프다는 울부짖음이다.


  둘째,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나조차도 대화하거나 이렇게 글을 쓸 때마저도 나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한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실수이다. 정신의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위험한 실수는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들에게 덧씌우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분쟁의 원인이다.’     


  자신의 검은 그림자를 타인에게 넘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욕이다. 우리는 그들의 욕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분쟁에 휘말릴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말이 있다. 그들이 던진 퀴퀴한 그림자가 내 몸을 휘감기 전에 최대한 빨리 햇살 속으로 던지자. 꾸물대다간 그림자의 검댕이 피부에 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투포환 선수처럼 도움닫기 하여 태양을 향해 그림자를 멀리 뿌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음습한 그림자가 알알이 흩어지며 눈부시게 사라진다. 나는 눈을 들어 하늘에 잠시 시선을 고정한다.


  셋째, 직장은 밥벌이의 공간이다. 그래서 월급을 받는다. 월급명세서를 살펴보면 휴일근무수당, 초과근무수당 등 몇 가지 수당이 있다. 수당은 정해진 봉급 이외에 따로 주는 보수로 정상적인 근무 외의 작업에 대하여 지급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항목으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욕 수당’도 포함돼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욕을 먹는 일’을 하나의 업무로 인식하기 위해서다. 학생, 학부모, 동료와 관련한 모두는 직업의 영역이다. 그러니 그들이 나를 욕하는 것도 비즈니스의 일부이다. 하지만 월급이 많지는 않으니 오래 노동하면 안 된다. 쥐꼬리만큼 기분 나빴다가 어서 쫓아낸다. 자칫 덫에 갇히면 이번 달 욕 수당도 나의 인내심도 금세 바닥난다.


  학교에 올해 첫 발령을 받은 신규 교사가 있다. 그런데 폭력적인 학생과 폭언을 퍼붓는 그의 학부모 때문에 담임 2개월 만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됐다.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단에 섰을 텐데, 현실은 참담했다. 나는 고통을 겪고 있는 후배에게 아무 조언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땐 말이야. 세 가지 원칙이 있어. 첫째는...”하고 읊어댔다간 나를 선배가 아닌 선생으로 여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세 번의 도전 끝에 운전면허 시험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물로 큰맘 먹고 외제 차를 준비했다. 빨간 미니 스포츠카와 폭신한 구름 모자를 쓴 달콤한 카푸치노를 들고 아침 일찍 교실 문을 두드렸다. 수업 준비를 하던 그녀는 ‘외제 차 Ferrari’라는 음료명을 보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선배의 애교 섞인 장난에 잠시나마 그녀의 그림자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철학자 니체는 ‘망각하는 자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실수도 남의 실수도 어서 잊자. 명심하라. 내게 욕 한 그는 자신이 한 짓을 이미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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