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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Nov 20. 2024

은밀한 효도

  매년 5월, 가정의 달마다 하는 비밀 미션이 있다. 바로 ‘은밀하게 효도하기’다. 아이들이 한 달 동안 부모님 몰래 효행을 한다. 그리고 그 반응을 관찰해 기록한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날, 부모님께 활동지를 공개하고 함께 소감을 적는다. 효도는 말로 하는 칭찬이나 안마나 포옹처럼 행동으로도 가능하다.


  자유롭게 참여하여 한 줄이라도 쓰면 학급 칭찬을 준다. 아이들은 몰래카메라 같은 과제여서 흥미롭지만, 활동지를 감추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매일 엄마가 가방을 뒤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종이는 학교에 두고 다니라고 했다. 그 대신 집에 가면 잊어버리니 알림장에 적어 주기로 했다. 그러려면 부모님을 속일 우리만의 암호가 필요했다. ‘효도 미션’을 떠올릴 만한 은어로 무엇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효도’와 발음이 비슷한 ‘포도’로 하자고 했다. 이후 나는 날마다 ‘포도’와 관련한 과제를 냈다.


  알림장에 ‘포도 먹기’라고 적었다. 그런데 다음 날, 주영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가 지금은 포도 철이 아니라 수입 포도를 먹어도 되냐고 여쭤보래요.”


  그래서 이번에는 ‘포도 먹기(수입 포도, 건포도 가능)’라고 상세히 적었다. 그런데 매일 포도만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도 3번 읽기, 포도 그리기, 포도 5번 적기’ 등 포도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보름쯤 지나자,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가 너희 선생님은 포도에 너무 집착한대요.”


  억울했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답답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꾹 참았다. 드디어 5월 31일, 아이들은 부모님께 그동안 쓴 종이를 보여드리고 소감을 적어 왔다.      


  5학년 2반 3번 권수빈

  나의 효도와 부모님 반응: “엄마가 갈아 준 수박 주스가 맛있어.”-“내가 사랑을 넣었어.”

  부모님 소감: 평소에도 나누는 대화지만, 이렇게 적어서 보여주니 더 고맙고 따듯합니다.     


  5학년 2반 10번 김주영

  나의 효도와 부모님 반응: “아직 젊어 보여요.”-포옹을 해 주셨다.

  나의 소감: 하기 힘들어서 기가 빠졌었는데,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니 기분이 좋았다.     


  5학년 2반 13번 이지수

  나의 효도와 부모님 반응: “엄마, 오늘 예뻐요.”-“왜 그래?”

  나의 소감: 재미도 있고, 효도도 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에도 하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소감: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읽어보니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아들이 대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5학년 2반 23번 최지훈

  나의 효도와 부모님 반응: “엄마의 말에 동의했다.”-엄마가 말을 더 길게 해서 힘들었다.

  나의 소감: 엄마가 말을 듣느라 힘들었지만, 좋아하시니 뿌듯했다.


  전부 읽어보며 속이느라 애썼을 아이들의 얼굴과 부모님의 다양한 표정이 그려졌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 깜짝 놀랐을 가족들의 모습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상한 선생님이라는 그동안의 오해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 보람 있었다.


  내게도 아이가 있다. 그런데 요즘 고3인 아들과 자주 부딪힌다. 일찍 깨워도 도로 눕고, 샤워는 왜 그렇게 오래 하는지. 어제도 지각했다고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었다. 그런데 오늘도 늑장을 부리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등굣길에 잔소리하니 아들도 짜증으로 반격했다(잘한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수험생이니 마음껏 퍼붓지 못한 채 분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효도 미션을 보니 어릴 적 모습이 떠 올랐다.


  아들이 세 살 때, 완두콩을 담은 통을 냉장고에 넣지 않고 그냥 두어서 몽땅 싹이 나 버린 적이 있었다. 아까운 걸 다 버려야 하나, 하고 속상해하고 있는데 아이가 다가왔다. 그리고 짧고 통통한 오른팔을 쭉 뻗어 귀 옆에 바싹 붙이며 이렇게 말했었다.


  “엄마, 콩알이 이렇게 손을 들고 있어요.”


  콩 사이를 비집어 나온 하얀 싹이 아이 눈에는 저마다 손을 번쩍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아들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니 웃음이 났다. 그리고 콩알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껴안으니, 근심이 사라졌었다. 그 시절, 힘들고 지칠 때 아이와 나란히 누워 동글동글한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평화로워지곤 했다. 지금 얄미운 이 녀석도 그런 아이였다는 게 우리 반 아이들의 효도 미션을 보고서야 떠올랐다(십여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으니 진정 '은밀한 효도'였다).  그래서 아침의 일을 후회하고 반성했다. 그리고 지금 녀석이 힘들 때, 내가 받은 효도를 사랑과 응원으로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 육아 기간이 길다고 생각했었는데, 함께 추억을 쌓는 시간이 어느덧 줄어 버렸다. 이렇게 불쑥 찾아올 줄 나도 몰랐다. 아마 몇 년 후, 우리 반 부모님에게도 나처럼 힘든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럴 때 지금의 기록을 꺼내, 존재만으로도 효도를 다 했던 우리 아이들을 기억해 내길 바란다. 그리고 성장하느라 내적 전쟁을 치르는 아이들을 넓은 품으로 안아주시길.


  오래전, 어린 아들을 아기 띠로 안고 지하철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아이의 바짓단을 당겨 내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발목이 다 나와 춥겄네. 애기 엄마, 그거 알어? 자식은 이렇게 살아 있어서, 손으로 만져지면 그게 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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