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부장님을 찾았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조용히 다녀오겠다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조회 시간에 아이들에게 안내 사항이 있다고 했다. 내가 평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교탁에 서자 아이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나는 학교의 우려를 전하며,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얘들아, 선생님이 밤새 잠도 못 자고 고민했어.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기로 했을까?”
“원래대로 갈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담임 선생님은 그럴 분이거든요. 우리를 가장 위하시니까요.”
아이들의 확고한 믿음에 아찔했다. 사실 취소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이 어른들의 노파심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의 미소에 아이들은 안심했다. 하지만 다시 분위기를 잡고, 선생님으로서는 힘든 결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앞으로 말썽 부리면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경고했다. 아이들 또한 내가 곤란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비밀을 꼭 지키고, 조심히 행동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됐다.
밥을 먹고 교실로 올라오니, 창밖에는 작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학생들과 창가에 기대어구경을 하고 있는데, 비를 맞으며 광활한 운동장을 누비는 녀석이 있었다. 어느 반인데 저러고 있나... 저러다 감기 걸리겠다, 고 걱정하며 바라보는데 낯이 익었다. 녀석은 바로 우리 반 현우였다. 제발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녀석은 수업 종이 치고 나서야 홀딱 젖어 나타났다. 어이가 없었다. 녀석들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나의 인내심이 멱차서, 나들이는 취소라고 공표해 버렸다. 아이들은 채찍비를 맞은 듯 고요했다. 늘 말대꾸하던 녀석도 묵묵했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후, 현우를 불러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너 하나를 위해 날짜도 바꿨는데, 왜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아침에 엄마한테 혼나고, 아까 애들이랑도 싸웠어요. 가슴이 답답해서 비를 맞으면 기분이 풀릴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래서 기분은 나아졌니?”
“네, 시원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어쩐지 양팔 벌려 빗속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영화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 같더라니. 대화를 해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내 마음도 누그러졌다. 용서해 줄 테니 우리 반을 위해 무엇을 할지 주말 동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도 번복할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월요일 아침, 현우는 일주일 동안 남아서 교실 청소를 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누구의 원망도, 탓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친구의 용기와 선생님의 용서에 박수를 보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들의 가을’ 날이 되었다. 우리는 간식, 돗자리, 도화지를 챙겨 교정 뒤편으로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야자수 놀이터로 갔다. 노란 은행잎이 간간이 보이고, 단풍나무는 끄트머리만 빨간 티가 났다. 울긋불긋 화려한 색깔을 기대했었는데, 아쉬웠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간식부터 먹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간식을 싸 왔냐고 현우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저으니 다가와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주홍빛 귤 두 알이 놓여 있었다.
내가 낙엽으로 글자를 만들면 좋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열띤 토의를 했다. 그러더니 ‘이게 5학년 5반의 가을이다!’라는 문장을 만들기로 했단다. 역시 아이들다웠다. 짝을 지어 한 글자씩 완성하고, 놀이터에서 놀기로 했다. 녀석들은 서로 역할을 나눠 잽싸게 작품을 완성하고, 튕기듯 뛰어갔다. 선선한 날씨였는데, ‘산 놀이’를 하며 쉬지 않고 움직이더니 아이들은 덥다고 겉옷도 벗었다.
그렇게 모두가 어울려 한창 놀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일기예보엔 맑음이었는데, 당황스러웠다. 나는 젖을 까봐 도화지부터 챙겼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모두 파라솔 아래로 모이라고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추운지 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오히려 시원하고 좋다며, 이렇게 다 같이 다닥다닥 붙어 참새처럼 비를 피하는 것도 추억이라고 했다. 다행히 곧 비가 그쳤다. 우리는 함께 도화지를 맞잡고 문장을 완성해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날씨도, 단풍도 녹록지 않았지만, 아이들 표정은 가을처럼 풍요로웠다. 정말 이게 5학년 5반만의 가을이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어땠냐고 물으니, 여태 학교 다니면서 가장 신나는 날이라고 했다. 어떤 현장학습보다도 오늘이 가장 재밌었다고. 나는 의아했다. 그래서 매일 보는 동네 놀이터인데 그렇게 좋았냐고 되물었다. 자주 오긴 하지만, 반 친구들 전체와 오는 것은 처음이라 새롭고 설렜다고 했다.
다음 날 현우는 글쓰기 공책에 이렇게 적었다.
‘어제 우리는 학교에서 나가 놀았다. 정말 꿈만 같았다. 놀이터에서 산 놀이, 지옥 탈출, 좀비 게임을 했다. 친구들과 같이하니 비가 오는지도 몰랐다. 너무 좋은 추억이 됐다.’
비가 오는지, 날이 추운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노는 철 모르는 아이들을 보며, 덕분에 나도 잠시나마 철부지로 돌아가 가을을 만끽했다. 이제 칠판에 붙어 있던 학급 칭찬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들의 가을’은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