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학급 칭찬이 다 모였다. 아이들은 무슨 활동을 할지 회의했다. 평소 엉뚱한 생각을 잘하는 현우가 손을 들더니 가을맞이 학교 밖 나들이를 가자고 했다. 바깥으로 나간다는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단칼에 싹을 잘라야 하나 고민했다. 그동안 댄스파티, 과자 파티, 피구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모두 교내 활동이었다. 교외 활동은 절차가 복잡하고, 책임도 따랐다. 그런데 아이들의 까만 눈망울에 홀렸었는지, 다수결로 정해지면 교장 선생님께 여쭈어는 보겠다고 했다. 다른 것으로 정해지길 원했지만, 언제나처럼 내 바람과는 달리 아이들은 모두 나들이를 원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우선 교장 선생님께서 허락하셔야 하고, 다른 반에는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는 달리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아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실에 가기 전, 학년 부장 선생님께 우리 반만 가도 괜찮은지 여쭈었다. 교장님이 허락하면 상관없지만, 나보고 대단하다고 하며 말끝을 흐리셨다. 우리 반은 개구쟁이로 소문났다. 교과 선생님도 수업이 끝나면,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이 녀석들을 데리고 안전지대를 벗어나다니. 내 발등이 찍힐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교장실에 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안 계시길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학부모 간담회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신이 주신 기회 같았다.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친절한 교감 선생님께서 이제 곧 끝나간다며 나를 붙잡으셨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장실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교장님은 내게 자신이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물으셨다. 솔직히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원하니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렸다. 너그러운 교장님은 쾌쾌히 내 청을 들어주셨고, 장소와 일정이 정해지면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말씀하셨다.
교실로 올라오니 아이들은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낙을 받았다고 하니 환호성을 질렀다. 곧바로 임원을 중심으로 장소와 시간, 활동 내용을 토의했다. 우리 학교는 대단지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모두 그 아파트에 산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단지 내 놀이터에 가기로 했다. 나보다 아이들이 놀이터 분야에 관해서는 더 빠삭하고 진지했다.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기차 놀이터는 멀고, 배 놀이터는 좁으니 야자수 놀이터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가을이니 나뭇잎으로 작품을 만들고, ‘산 놀이’를 하자고 정했다.
아이들은 빨리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모두 참여하길 바란다며, 혹시 결석 예정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 현우가 다음 주에 여행을 간다고 했다. 아이들은 한 사람 정도는 빠져도 된다며 수군댔다. 현우는 자신이 제안했던 나들이를 못 갈까 봐 등이 달아 들썩거렸다. 나는 한 명의 학생도 소중하다며 다다음 주에 가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강조하며 회의를 마쳤다.
퇴근하면서 야자수 놀이터에 들렀다. 정말 야자나무 조형물이 있고, 가슴 높이의 야트막한 언덕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꼬마들이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 저게 아이들이 말했던 ‘산 놀이’ 구나!’
놀이터는 넓고, 주위에 평평한 나무 덱이 있어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기에 알맞았다. 단풍이 든 깊은 가을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뛰놀 아이들 모습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살랑거렸다.
집에 돌아와 ‘우리들의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교장님께 제출할 수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부장님께 연락이 왔다. 이번 부장 회의에서 우리 반의 외부 활동이 화두였다고 했다. 5학년 5반처럼 개별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학부모의 요구가 점차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우리 반의 일이 전교에 알려졌다니. 요즘 공교육의 심각한 분위기를 알기에, 동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벽에 갇힌 듯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런 걱정은 당연했다. 전달하는 부장님도 난처한 눈치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묘안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밤새 궁싯거리며 잠을 설쳤다. 묘수를 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별수 없었다. 그저 기뻐하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만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