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연이는 정 많고 세심하다. 내가 앞머리를 자르거나 가르마만 바뀌어도 바로 알아차린다. 나의 표정도 유심히 살피는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내게 다가와 그림 카드를 건넨 적이 있다. 카드에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밝게 웃고 있는 하늘다람쥐가 그려져 있고, ‘선생님이 힘들 때는 안아 줘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을 모니터에 붙여 두고 지칠 때마다 바라본다. 선생님도 가끔은 따듯한 포옹이, 그리고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이 채연이의 맑은 눈에는 보인 것이다.
그런 아이의 아픔이 내게도 보였다. 아마 채연이는 자신이 상처가 있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도 느낄 수 있었을 테다. 친구를 유난히 좋아하는 채연이는 글쓰기 공책에 이런 글을 적었다.
“친구 같은 가족이 좋다. 하지만 가족 같은 친구는 싫다.”
사춘기 여자아이들의 예민한 친구 관계는 전류가 흐르는 거미줄 같다. 풀기도 힘들지만, 자칫 잘못 건드리면 감전되어 내상을 입기도 한다. 어른들은 거미줄을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인 것을 안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거미줄은 유난히 반짝거리고, 매력적이다. 자신을 옭아매더라도 무리에 감겨있어야 안도한다.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 녀석은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룹이 형성된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채연이가 무리와 어느 정도 어우러지는 듯해 안심하면, 도로 튕겨 나와 따로 놓여있었다. 나는 우선 가만히 지켜봤다. 아이는 또다시 버려질까 봐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물건도 가져오고, 맛있는 간식도 두둑이 가져와 나눠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관심은 그때뿐이었다.
한 가닥 얇은 거미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혹여나 끊길까 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이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괜찮냐고 물었다. 아이는 우선 혼자 해결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하며 어깨를 오래 토닥였다.
SNS가 일상인 아이들은 하교 후에도 메시지로 대화를 나눈다. 채연이는 이유 없이 자신을 멀리하는 친구들과 밤새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울고불고했다. 그런 아이가 답답한 어머니는 내게 하소연하셨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넘겼으면 좋겠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저렇게 쏟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스스로 깨닫고 성장하는 것은 아이의 몫이자 특권이었다.
다행히 채연이는 글로 자신의 속마음을 내게 털어놓았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라일리처럼 감정이 수시로 바뀌고 예민해져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 울음을 참지 않고 맘 편히 울고, 행복한 척하던 모습에서 진짜 행복해지려고 한다고 썼다. 나는 모든 친구가 좋은 친구인 것은 아니며, 좋은 친구는 너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상처 주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성숙한 채연이를 응원한다고 적었다.
국어 시간에 우리 반 글 모음집을 만든다고 했을 때 채연이는 관심을 보였다. 컴퓨터실에 가서 ‘Padlet’이라는 프로그램에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다. 자신이 쓴 글을 인터넷으로 남에게 공개하는 것이 처음인 아이들은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꼬박 글쓰기에 집중했다. 나도 예시로 글을 올렸다.
다음 날 친구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기로 했다. 자신의 앞번호 2명, 뒷번호 2명은 필수로 써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읽고 피드백을 해 주라고 했다. 나도 전부 읽어봤다. 여행에서 즐거웠던 일, 부모님을 잃어버려 무서웠던 일, 혼자 모험하며 뿌듯했던 일 등 다양한 글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내 글에 어떤 반응이 몇 개나 달릴지 은근히 기대됐다. 그런데 가장 인기 글은 채연이의 ‘질투 많은 내 친구’라는 글이었다. 아이도 깜짝 놀라며 자기 글에 댓글이 가장 많다며 내게 자랑했다. 댓글이 많아질수록 채연이의 얼굴도 밝아졌다. ‘감정이 잘 드러나 있어서 재미있다. 제목을 잘 지었다. 질투 많은 이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등 독자의 관심이 백 개가 넘었다(내 글에는 예의 바른 5명이 의례적인 칭찬을 남겼다.).
사춘기 채연이의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표현력이 또래의 마음에 닿아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자신의 글로 친구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은 소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는 고민, 불안,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충만, 평화, 확신으로 가득 차 완전하게 안전해 보였다.
이제 글쓰기 프로젝트를 마친다고 말하며, 불을 끄고 컴퓨터실을 나가려는데 채연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선생님, 애들이 2편은 언제 나오냐고 자꾸 물어봐요. 우리 언제 또 글 쓰러 와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박연준의 산문집 <쓰는 기분> 서문이 생각났다.
쓸 때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내가 아니면서 온통 나인 것, 온통 나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나인 것. 쓸 때 나는 기분이 전부인 상태가 된다. 현실에서는 만질 수 없는 ’나‘들을 모아 종이 위에 심어두는 기분. 심어둔 ’나‘는 공기와 흙, 당신의 눈길을 받고 자랄 것이다. 쓸 때 나는 나를 사용한다. 나를 사용해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그건 나를 분사해, 허공에서 입자로 날아가는 기분. 나를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러 가는 기분. 나를 비처럼 맞은 당신이 어떤 표정인지 살피러 가는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