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진로 수업을 할 때면 아이들이 종종 묻는다. 그럴 때마다 아니라고 한다. 그럼 꿈이 뭐였냐고 따라붙는 질문에, 나는 ‘미스코리아’라고 답한다.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게 뭐냐고 물으면 지금의 아이돌 같은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알아듣는다. 하지만 완전히 농담은 아니다.
어릴 적, 거울을 보면서 최대한 예쁜 표정을 지어 봤었다. 눈썹을 추켜올려 눈을 크게 만들어 보고, 보조개를 만들고 싶어 꼬리빗의 끄트머리로 양 볼의 대칭점을 연신 누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보조개 대신 상처만 생겼다. 엄마 립스틱도 몰래 발라 보고, 미스코리아 특유의 사자머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스프레이도 잔뜩 뿌렸다. 하지만 그냥 사자와 비슷할 뿐 미스코리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물려받은 부모님의 우월한 외모 DNA가 내게도 언젠가는 발현되길 기다렸다. 어릴 적, 집에 손님들이 오시면 우리 셋은 나란히 서서 맞이했다. 그러면 어른들은 먼저 언니를 보고 이렇게 인사하셨다.
“어머, 엄~청 예쁘게 생겼네.” 그리고 옆에 있는 나를 건너뛰고 남동생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 엄~청 잘 생겼네.” 끝으로 나를 보고는 “어머, 엄~청”에서 잠시 멈칫하며 말을 고르셨다.
“어머, 엄~청 성격 좋게 생겼네.” 그때 나는 미스코리아의 꿈을 접었다. 그러면서 성격이라도 좋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문제를 적으시더니 출석번호를 부르셨다. 나와 희진이가 걸렸다. 희진이는 우리 반에서 성적은 꼴찌였지만, 얼굴은 가장 예뻤다. 나는 앞으로 나가 문제를 풀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머리를 긁적이며 우두커니 서 있던 희진이를 선생님은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공부 안 해도 되겠다. 그냥 들어가.”
그 말에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이라면 성 인지 감수성에 대해 논했을 수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당연한 명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부터 학업에 몰두했다. 덕분에 성적이 올랐고, 학교에서도 기대가 컸다. 그런데 대망(大望)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크게 망치고 말았다(진정한 大亡이었다.). 지금도 회자하는 97학년도 역대급 불수능의 불화살을 정통으로 맞고 내 점수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내 성적에 놀란 담임선생님은 집으로 달려오셨다. 그리고 교육대학교를 권하셨다.
수능 트라우마로 재수는 자신 없었다. 수학을 사랑했던 나는 수학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교사가 되는 것은 중등이나 초등이나 같으니, 선생님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바로 취업하면 빨리 독립할 수 있다는 점도 솔깃했다. 교대에 원서를 넣고 기다렸다. 다행히 추추추추가합격을 했다.
대학 4학년에는 임용고사 준비로 분주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눈앞이 캄캄했다. 친구들이 수업을 마치고 노량진 고시학원에 갈 때, 나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5시간이 걸리는 통학에 병원까지 가야 해 공부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다행히 그해 초등교사를 많이 선발했고,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다. 아마 턱걸이로 붙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