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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7

故 전유성을 추모하며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잘 지내고 있니? 이제껏 해 온 것처럼 담담하게 마지막 경주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너의 말이 믿음직스럽네. 엄마도 작년보다 훨씬 마음 편히 너의 남은 시간을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어. 끝이 정해져 있으니, 힘내서 달려보자.


그저께 최초의 개그맨인 전유성 님(이분이 ‘개그맨’이라는 말을 처음 만듦)이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네 동생은 누군지 잘 모르더라. 그래서 엄마가 가장 웃기다고 생각하는 분이고, 개그콘서트를 만든 분이라고 알려줬지.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어릴 때 개콘이 정말 재밌었다고 했어. 그런데 엄마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며 그때 이야기를 해줬어.

엄마가 일찍 자야 한다고 세 개만 보게 했었대. 그래서 한 코너, 한 코너가 그렇게 소중했다고. 자기는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오빠가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보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뒤를 돌라고 했었대. 그러면 TV를 등지고 앉아서 보고 싶은 코너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었다고.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고. 그땐 어려서 뭐가 재미있는 것인지도 몰랐는데, 오빠가 뒤돌자고 하면 뒤돌고, 엄마가 이제 한 개 남았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했었대.


네 동생 얘기를 들으니 잊었던 기억이 생생해졌어. 아마 넌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고, 동생은 유치원에 다녔을 거야. 개콘 다음날은 월요일이니 출근의 압박이 있었겠지. 너희도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고, 그래야 세 명의 등굣길이 평화로웠을 테고. 엄마는 주로 빨래를 개키며 개콘을 봤던 것 같아. 주말과 주중 사이, 직장인에게는 위로의 마지막 콘서트 같은 시간이었지.

너희가 마룻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나란히 앉아있던 통통한 엉덩이도 생각나. “이것 보고 싶어? 다음엔 뭐 나올 것 같아?" 하며 평소와 다르게 사이좋게 의논하던 모습이 귀여웠지. 하나만 더 보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사정하기도 하고, 점점 꼼수가 늘어나고 취침 시각도 늦어졌었지. 돌아 앉아 귀로는 다 들으면서 시간을 벌려는 속셈을 알면서도 속아줬었어. 지금처럼 다시 보기가 없었기에 더 집중하며 재미있게 봤던 것 같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웃으며 주말을 마무리하게 해 준 고마운 프로인 ‘개그콘서트’도 전유성 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어. 당시로는 새로운 포맷의 실험적인 시도였지.


전 생애에 걸쳐 코미디의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애썼기에 그는 개그계의 대부로 불리지. 그리고 개그 활동 외에도 컴퓨터와 역사, 문화와 관련된 여러 책을 집필하며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최근까지 자기 생각과 경험을 공유해 왔어. 임종 직전에도 유쾌하게 "나는 곧 죽어. 장례는 수목장으로 해줘."라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생을 마감했지. 그는 예원 예대 교수로서 김신영을 가르치기도 했어.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은 한물간 개그우먼이라며 자책했을 때 그는 오히려 축하한다고 했대. 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한물간 게 왜 축하할 일이냐고 되물었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어.

“한물가고 두물가고 세물가면 보물이 되거든. 너는 보물이 될 거야. 두고 봐.”


결국 훌륭한 스승의 제자는 보란 듯이 보물이 되었고,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와 스승의 마지막을 지켰어.


고난의 시간을 버티고 견디다 보면 보석같이 빛나는 존재로 거듭나지.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살아내려면 ‘유머’라는 공기가 필요해. 폐기흉으로 숨쉬기 힘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유머라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전유성 님. 그처럼 우리도 남은 한물, 두물, 세물의 시간을 가볍게 호흡하며 보내보자.


2025년 9월 27일 토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내일 마라톤이 있는데 비예보가 있네. 우중런은 처음이라 걱정이야. 옷이 흠뻑 젖어 무겁겠지. 신발이 젖어 발도 부을 테고. 하지만 한물, 두물, 세물을 첨벙첨벙 가볍게 밟고 달리다 보면, 결승선에서 메달이 빛나고 있겠지?



<답글>


개그콘서트 추억이닼ㅋㅋㅋㅋ 그땐 ㅇㅇ이가 그냥 동생 같았는데 이제는 친구 같아.
낼 마라톤 비 오면 위험할 텐데 다치지 않게 조심해. 잘 달리고 와서 글 남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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