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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6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제 날이 선선해졌어. 지난주만 해도 낮에는 30도가 넘어서 학생들과 팥빙수를 만들어 먹을 정도로 더웠는데.


팥빙수 파티는 엄마가 준비한 서프라이즈였어. 미리 우유를 얼려놓고, 빙수용 팥과 인절미, 연유를 주문했지. 전날 알림장에 숟가락을 가져오라고 적었더니 아이들은 이유를 궁금해했어. 그래서 이렇게 덧붙였지.


‘준비물: 숟가락(그냥 가져오기)’


다음 날, 조회 시간에 숟가락을 가져온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어. 그런데 달랑 세 명뿐이더라. 빠뜨린 학생이 있을 것 같아 집에서 있는 대로 숟가락을 챙겨 왔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기가 막혔지. 엄마는 학생들에게 준비물이 없으면 참관하라고 했어.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아이들은 동생에게 급식용 숟가락을 빌려오기도 하더라.


팥빙수를 먹고 나면 점심을 안 먹을 것 같아서 5교시가 적당했어. 마침, 4교시가 도서관 시간이어서 몰래 준비해 놓을 여유도 있었지. 학생들과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교실에 들러 빙수 재료를 교탁 속에 숨겼어. 그런데 갑자기 소방 사이렌이 울리는 거야. 오작동이길 바라며 서둘러 도서관으로 갔지.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모두 일어서서 선생님은 어디 갔었냐고 묻더라. 그래서 화장실에 갔다 왔다고 둘러댔지. 내가 없는 사이에 울린 경보음 소리에 놀란 아이들은 반사적으로 뛰쳐나와 운동장까지 나갔었다고 했어. 그동안 연습한 대피 훈련의 효과였지. 다행히 불이 난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너희들은 어디서든 살아남을 것이라고 칭찬했어. 그리고 사실을 숨긴 채 책을 폈지.

드디어 5교시. 책상을 깨끗이 닦고 숟가락을 꺼내라고 했지. 그리고 짜잔~하며 빙수 재료를 꺼냈어. 그러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지. 학교에서 팥빙수를 먹는 것은 처음이라며.


숟가락이 있는 사람은 얼린 우유를 한 개씩 가져가라고 했어. 숟가락의 여부로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지. 모서리부터 긁으라며 시범을 보여주니 아이들은 열심히 따라 했어. 벽돌 같던 우유가 잘 갈린다며 신기해했어. 배스킨라빈스 알바가 된 것 같다며 눈을 반짝이더라. 조심조심 종이 팩에 구멍이 나지 않게 힘 조절을 잘하라고 당부했지. 그리고 숟가락 없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어. 세어보니 열 명이었어.

집에서 가져온 숟가락 봉지를 들어 보이니 역시 우리 선생님이라며 손뼉을 치더라. 그런데 숟가락은 여덟 개뿐이었어. 몇몇은 친구와 같이 만들겠다고 했어. 숟가락을 나눠주면서, 선생님이 숟가락을 다 가져와서 식구들이 밥을 못 먹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지. 그러자 아이들은 가족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찾아보니 일회용 숟가락이 있어서 모두 행복하게 빙수를 먹었지. 한 사람만 빼고. 바로 엄마.

먹다가 흘리고, 누가 인절미를 많이 가져갔다고 싸우고, 남은 빙수는 어디에 버려야 하냐고 물어대니 정신이 없었지. 수십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이렇게 생각했어.


‘내가 미쳤지, 미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사서 고생이야. 다시는 하나 봐라.’


정작 엄마는 한 숟갈도 못 먹고 넋이 나가서 앉아있었지. 그런데 이런 소리가 들렸어.

“진짜 맛있다. 여태 먹어본 빙수 중 제일 맛있어.”


콩고물로 범벅이 된 책상을 닦으며 엄마는 아이들에게 물었어.

“너희들 또 먹고 싶니?”

“네!


속도 모르고 아이들은 숟가락을 들고 신이 나서 대답했지. 아마 다음에도 엄마는 땀을 닦으며 후회하겠지. 하지만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에 또 새로운 이벤트를 구상하겠지. 그렇게 지루할 틈 없이 25년이나 해 온 것을 보면, 이 일이 적성에 잘 맞나 봐. 생각보다 일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인간관계도 맺어지니 직업은 매우 중요해. 수명이 길어지면서 더욱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네 아빠와 엄마는 대학에서의 전공이 진로가 됐어. 운 좋게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한 덕분이었지. 너도 다시 입시에 도전하는 지금, 네게 잘 맞는 전공을 선택하길 바란다. 그 가능성을 위해 남은 54일 동안 원 없이 에너지를 쏟길. 그 과정에 페이스 메이커로 늘 함께 할게.


2025년 9월 20일 토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빙수 먹은 날, 모임이 있어서 숟가락을 가방에 넣고 퇴근했거든. 저녁을 먹고 있는데 네 아빠에게 문자가 왔어. 밥을 먹으려는데 집에 숟가락이 없다고.


< 답장 >

뭔가 잔잔하게 힐링되는 글이네. 나도 엄마 같은 선생님 있었으면 좋았을 거 같아.

따분한 일상에 가끔씩 변칙적인 활동이 고팠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활동을 한 경험이 거의 떠오르지가 않네. 아이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겠다 ㅎㅎ

난 요새 무조건 의대라기보다는 다양한 전공에서 그려지는 진로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더라고. 예를 들어 ai학과 같은 거도 멋있더라고.

암튼 f1으로 치면 60 랩 중 55 랩정도 다다른 이 시점에 남은 5 랩 앞에 차들 다 추월한다는 전투적인 마음으로 노력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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