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차박 3편
“네, 여기 사람 있어요.” 황급히 물을 잠그고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어. 엄마의 대답에 남자는 이렇게 당부했어.
“나올 때 문 닫고 불을 꺼 주세요.”
번개 샤워를 한 후, 옷을 챙겨 입고 나왔어. 개운하니 더 바랄 게 없었어. 보름달이 비추는 해변을 거닐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 ‘하루키의 여행법’이라는 책을 읽었어.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 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지금의 내 모습과 닮아있어 피식 웃음이 났어. 그러면서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 편의점 아주머니께서 11시에 문을 닫으셔서 엄마도 차 안에 누웠어. 그리고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기고 파도 소리를 들었지. 낭만적으로. 그런데 잠시 후,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깨달았어. 파도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것.
잠을 설친 이유가 낯선 잠자리 때문이었는지, 밤새도록 쳐대는 파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생각보다 쌀쌀한 밤 기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던 것 같아. 일출을 보려고 설정해 둔 알람이 울려댔지만, 끄고 좀 더 눈을 붙였어.
아침 바다는 조용했어. 월요일이기 때문인지, 흐린 날씨 때문인지 텅 빈 해변에 파라솔과 평상이 덩그러니 놓여있어 어제 봤던 바다와 다른 곳 같았지. 10만 원짜리 평상 옆에 캠핑 의자를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컵라면을 먹었어. 그리고 미리 갈아 온 원두에 남은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지. 비싼 평상 옆에서 마시는 커피라 그런가 더 맛있더라.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고 운전석에 앉았어. 계기판을 보니 기름이 거의 없더라. 그래서 간성 읍내에 있는 주유소에 갔어. 지나다 전통시장 표지판이 보여서, 점심을 먹을 겸 시장에 갔어. 간성 전통 시장은 주차장도 가깝고, 천장도 있어서 편리했어. 시장 구경을 하다 보니 옹심이 집 간판이 보였어.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은 나뿐이었지.
주인아주머니께서 금방 옹심이를 내어오셨어. 감자로 빚은 동글동글한 옹심이가 그릇에 가득했어. 들깻가루와 김이 고명으로 뿌려져 있어 고소한 향이 진동했지. 숟가락으로 국물이 자작하게 한 알 떠서 입에 넣었는데 깜짝 놀랐어. 강원도에 올 때마다 유명한 옹심이 식당을 가봤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어. 쫀득하지만 찐득거리지는 않고, 국물에서도 잘게 썬 감자채가 부드럽게 씹혔어. 무슨 차이인지 알고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숟갈 먹다가, 옆 테이블에 앉아 멸치를 다듬고 계시는 아주머니께 말을 붙였어.
“사장님, 정말 맛있네요. 그런데 그동안 먹었던 옹심이와는 맛이 완전히 다르네요. 참 신기해요.”
“우리는 생감자만 써요. 속초에 있는 거기는 전분을 넣죠. 안 넣는 집이 없어요. 그럴 수밖에요. 감자로만 하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요. 우린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요. 이제 우리 집 없어지면 이 맛은 못 봐요.”
“그래서 맛이 다르군요. 제가 여태 먹었던 옹심이는 진짜 옹심이가 아니었던 거네요. 여기서 오래 하셨어요?”
“40년 됐죠. 옛날엔 주민이 많았는데 요즘엔 군인뿐이에요.”
“배달도 돼요?”
“그럼요. 남편이 오토바이로 갔다 와요. 한 그릇 시켜도 배달비는 없어요. 수십 년 된 단골한테 어떻게 받아요.”
“너무 맛있어서 서울에 있는 가족들 먹이고 싶은데, 포장해도 될까요?”
“두 시간 지나면 굳어서 안 돼요. 잘 끓여야 다시 쫄깃해지는데, 집에선 그렇게 못 해요.”
아주머니의 차분한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어. 아쉽지만 국내 유일의 진짜 옹심이를 엄마만 먹었네. 수능 끝나면 같이 먹으러 가자.
집으로 가는 길은 피곤했어. 하루키의 말처럼 여행은 피곤한 것이야. 혼자 여행은 더욱 피곤하고, 차박은 최고로 피곤하고. 그런데 왜 굳이 떠나는 것일까?
첫날, 집을 떠나 첫 여정으로 내린천 휴게소에 들렀었어. 4층에 올라가니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시원한 풍경이 사방으로 펼쳐졌지. 푸드 코트가 꽤 넓었지만, 사람으로 가득했어. 엄마는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아 옥수수를 뜯어먹으며 사람 구경을 했어.
북새통 속에서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연로한 부모님을 챙기느라 분주한 가족을 보니 마치 다른 세상을 관찰하는 것 같았어. 나만 여유 있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느낌이랄까. 너희 어릴 때 생각도 나서 창밖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6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같이 앉아도 되는지 물으셨어. 엄마는 당연히 된다고 했지. 그녀는 앞에 앉더니 혼자 왔냐고 물으셨어. 엄마가 그렇다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지
“혼자 여행하면 편하지요. 전 남편과 왔는데 귀찮네요. 자기 멋대로 하고 자꾸 고집만 부리고. 그렇게 혼자 오면 뭐랄까.... 해방감 같은 게 느껴지죠.”
같이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녀의 남편이 다른 곳에 앉더니 이리 오라고 손짓했어. 아주머니는 싫다고, 여기가 좋다고 했어. 하지만 남편분은 꿈쩍하지 않으셨지.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리를 뜨셨지.
여행 내내 그녀의 말이 맴돌았어. 해방감, 해방감, 해방감... 그래, 불편을 자처하면서 여행하는 이유는 바로 해방감이었어. 너도 그곳이 편안하겠지만 답답하겠지. 반복되는 루틴은 안전하지만, 지루할 테고. 이제 해방의 그날이 딱 두 달 남았네! 그날은 꼭 온다! 반드시 온다! 해방의 그날이 오면 같이 옹심이를 먹으며 기쁨을 만끽하자!
2025년 9월 13일 토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엄마는 내일 마라톤 대회가 있어. 결승선에서 느낄 해방의 도파민이 벌써 기대돼. 만족스러운 기록을 위해 일찍 자고, 페이스 조절 잘해서 온 에너지를 쏟아 달릴게! 지금도 힘들게 달리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