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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4

나 홀로 차박 2편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너도 오래전에 딱 한 번 갔던 차박 여행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니 신기하다. 그날 들었던 노래와 별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다니, 놀라워. 네 동생은 그때 차에서 먹었던 김밥이 생각난대. 그냥 동네 김밥이었지만 여태 먹어본 중 가장 맛있었다고! 여행은 정말 놀라운 것 같아. 익숙한 음식과 음악도 특별하게 느껴지니까.


그럼 이어서 이야기를 이어갈게. 물회를 사러 가기 전에 화장실부터 들렀어. 긴장이 풀려서인지 배가 살살 아팠거든. 우리나라 공중화장실은 참 넓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빈칸에 들어갔어. 큰일을 치르니 모든 근심 걱정이 없어지더라. 그런데 오른쪽 벽을 보니 휴지가 없는 거야. 뒤를 돌아봐도 마찬가지였지. 당연히 칸마다 있을 줄 알았는데, 휴지는 바깥에 공용으로 있던 거야.


부를 사람도 없고, 이제 본격적인 차박이 시작인데 옷을 버릴 수도 없고. 난감하더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열어봤어. 하얀 게 언뜻 보였어. 휴지구나! 하고 꺼냈는데 마스크였지. 마스크 안쪽 면이 촉촉하고 부드럽더라. 이후는 상상에 맡길게.


깔끔한 기분으로 물회를 향해 떠났어. 차를 세운 봉수대에서 횟집이 모여있는 송지호까지는 1km 남짓.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희미한 길을 따라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걸어갔어. 더웠지만, 피부를 식혀줄 에어컨과 얼음 동동 물회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웠지. 콧노래도 흥얼거렸던 것 같아(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민박집이 보였어. 빨랫줄에 널린 젖은 수영복과 벽에 기대 세워 놓은 물방울 맺힌 튜브가 ‘이게 여름이래두~’이라고 말하는 듯했어. 바다 내음을 맡으며 식당을 보니 군침이 돌았지. 손님이 북적이는 곳이 맛있을 것 같아 들어갔어. 그런데 물회 1인분을 달라고 하니 사장님 표정이 굳어지더라. 그리고 테이블을 닦으며 말씀하셨지.


“물회는 2인분부터 가능합니다.”


전혀 미련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어. 엄마도 덧말 없이 나갔지.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어.


‘요즘 어느 시대인데 1인분이 안 된다니. 2만 원이면 한 끼로 싼 것도 아닌데, 장사 잘된다고 배가 불렀네. 널린 게 음식점인데, 비즈니스 마인드가 형편없군!’


당당하게 두 번째 식당에 들어갔어. 그런데 대답은 같았어. 다음도 그다음도. 그렇게 여남은 퇴짜를 맞고 나서야 깨달았지.


‘아! 난 서울 촌년이었구나! 서울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내가 누리던 편리와 혜택을 당연시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던 가게에 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들어갔어. 그리고 횟감을 손질하느라 분주한 직원에게 이렇게 주문했지.


“저... 물회 2인분 주문할게요. 그런데 1인분은 여기에서 먹고, 1인분은 포장해 주세요.”


이 정도면 고성의 법칙은 지키면서 내 목적인 ‘에어컨과 함께 물회 먹기’도 이룰 수 있는 합리적인 제안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상대편은 마뜩잖아 보였어. 혼자 온 거냐며,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셨지. 그러더니 1인분을 포장만 주겠다고 하셨어. 빈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여기에서 먹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 하지만 ‘저녁에 물회를 주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게다가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물회를 먹는 것은 고성의 물을 흐리는 행동입니다.’라는 횟집 사용 수칙이 메뉴판 옆에 궁서체로 쓰여 있는 것 같았어.


결국 물회가 담긴 봉지를 들고 뒤돌아 나왔어. 그리고 올 때보다 더 어두워진 길을 터벅터벅 걸었지. 더 끈적해진 뺨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연신 떼어가며. 그렇게 왕복 2.5km를 걸어 내 차를 만나니 집에 온 듯 반갑더라. 소중한 물회가 녹기 전에 차 안에 상을 차렸지. 드디어 영접하는 물회! 꼬들꼬들한 회와 아삭한 채소가 매콤한 국물과 어우러져 황금 비율을 이루었어. 어두워서 내용물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로지 미각만으로 판단해도 흑백요리사 우승감이었지. 맥주 한 캔과 페어링 하니 천국이었지. 아, 또 침이 고인다.


다 먹고 나니 9시 반쯤 됐어. 이제 샤워를 해야지. 투명 스티커처럼 온몸에 달라붙은 모래를 땀과 함께 시원하게 씻어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었지. 수건과 용품을 챙겨 샤워장에 갔어. 그런데 입구에 이렇게 적혀있었어.


‘요금 3,000원, 이용 시간 08:00~20:00’


아니 샤워는 자고로 자기 전에 하는 것인데, 저녁 8시에 문을 닫다니! 이놈 고성의 법칙은 계속 예상 밖이었어! 맥주를 마셔서 운전도 못 하는데 이대로 자야 하나 암담했어. 그런데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나뉜 샤워장 계단 밑 가운데에 한 남자분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어. 성수기여서 연장 운영하나 싶어서 반가운 마음에 여쭈었지?


“지금 입장 가능한가요?”

......

“저는 와이프 기다리는 중인데요?”


그는 직원이 아니었어. 그래도 어쨌든 아직 들어갈 수 있다니 살았구나, 하고 안으로 들어갔지. 해수욕장 샤워장은 어릴 때 와 보고 처음이었는데, 수십 년 전과 똑같았어. 칸막이도 없는 넓은 공간에는 옅은 푸른색의 오래된 타일이 촘촘하게 붙어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도꼭지가 달려 있었지. 그곳에는 입구에 있던 남자분의 부인과 나 둘 뿐이었어.


샤워기를 높이 들어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엉겨 붙은 정수리에 물을 뿌리니 천국이었지. 온몸에 열심히 비누칠하고 있는데, 여자분이 나가더라. 아마 그녀의 남편도 같이 가버렸겠지. 밖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해졌어. 온 감각 신경이 예민해져서, 물소리도 더 크게 울렸어. 그런데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 목소리가 들렸어.


“여기 누구 있어요?”


이곳에는 발가벗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있었지. 그리고 그게 엄마였고. 엄마는 무사히 샤워를 마쳤을까? 지금 네 동생 충치로 치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이제 진료가 다 끝났대. 다음에 계속.


2025년 8월 30일 토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고성 이야기를 쓰니 서울이 또 고맙게 느껴지네. 너도 휴가 나오면 그럴 것 같아. 이제 일주일 뒷면 집에 오니 힘내자!


<답장>

오키

글 읽으면서 머리 식히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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