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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2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오늘은 종일 비가 오네. 방학의 끄트머리에 빗소리를 들으니 차분하게 마무리하는 기분이야. 소리는 사람의 기분을 가장 빨리 바꾸는 도구인 것 같아. 너도 기숙학원에서 가장 힘든 게 음악을 못 듣는 것이라고 했지. 아침마다 단잠을 깨우는 기상 음악이 반가울 리 없겠지만, 그거라도 길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그런 규칙이 있는 것이겠지만, 음악이 없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마른 식빵처럼 건조하다.

며칠 전에는 서초구에 있는 세계 최고의 오디오 박물관 ‘오디움’에 갔어. 이곳은 1877년 유성기 발명 이후 150년간의 오디오를 수집, 보존, 연구 및 전시하는 장소야. 건물 또한 오직 ‘좋은 소리’를 위한 것이었어. 들쭉날쭉한 알루미늄 파이프 2만 개가 수직으로 외벽을 감싸고 있어 압도감이 들었어. 여느 빌딩과 달리 대로변이 아니라 안쪽 계단으로 내려가야 정문으로 이어지는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어.


안으로 들어가니 천장이 뻥 뚫린 듯 높았어. 대형 스피커가 뿜어내는 음향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도록 층고를 9m로 높인 것이었지. 목재로 만든 벽면은 따뜻한 분위기를 주면서도 흡음재와 음향 판 등의 역할도 했어. 하얀 궁전 같은 라운지에서 LP 명반을 감상했는데, 공간의 기둥부터 천장까지 온통 흰색 패브릭 소재로 감싸져 있었어. 소리를 이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건축가 쿠마 켄고의 깊은 고민과 배려가 느껴졌어. 덕분에 이 전시관은 2025년 베르사유 건축상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에 꼽히기도 했어.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어. 대부분의 시각 중심의 박물관과 달리 설명이 끝나면 조명이 어두워졌어. 빈티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지. 익숙한 곡부터 처음 들어보는 노래까지 10곡 정도 들을 수 있었어. 그런데 수백 번은 들어본 비틀스의 Yesterday가 색다른 교향곡처럼 들리기도 하고, 낯선 재즈곡에 울컥 눈물이 나기도 했어. 물속에 잠긴 듯 음악으로 온몸이 꽉 차게 몰입되는 특별한 경험이었지.


청각이란 참 신기한 것 같아. 오감 중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지. 태아는 임신 6~12주 사이에 소리와 진동을 느끼기 시작해 4~5개월에 멜로디에 반응해. 그래서 엄마가 네가 뱃속에 있었을 때, 아름다운 노래도 불러주고, 잠언도 읽어줬잖아. 다 기억하지?


그러면서 죽기 직전까지 남아있는 마지막 감각이기도 해. 그래서 임종을 앞둔 순간, 가족들은 환자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들려주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죽은 것이니 청각은 생명 그 자체야. 이번 전시를 통해 청각만으로 벅차게 완벽한 생명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어.


대학에 가면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했지.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훌륭한 오디오는 없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너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싶구나. 네가 연주하는 유키 구라모토나 이루마의 곡을 들으면 우아하게 설거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년에는 새로운 악기도 배울 테니 더 기대되네. 그동안 엄마는 보컬 연습하고 있을게.

2025년 8월 13일 수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엄마는 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첼로처럼 부드럽고 둥근 나무처럼 무게감이 느껴지거든. 신기하게도 둥둥 떠 있던 불안한 안개가 걷히고 안도감이 들어. 그 덕분에 지금까지 용기 내서 사뿐사뿐 올 수 있었어. 엄마가 마지막 순간에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최고의 행운이겠지. 그때 ‘잘 가’라고 말해주면 겁내지 않고, 씩씩하게 올라갈게.


< 답장 >


내 목소리가 좋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엄마한텐 좋은가 보네 ㅎㅎㅎ 기숙 나가면 더 자주 들려줄게요오.

마지막 순간에 '잘 가'는 너무 슬프니깐 '이따 봐, 다음에 또 봐'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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