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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1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드디어 엄마는 방학했어. 방학 중 중요한 일과는 네 동생을 학원에 데려다 주기. 10시까지 가야 한다고 해서 자동차 열쇠부터 찾았어. 어제 들었던 가방에 손을 넣었는데 열쇠가 없더라. 분명히 가방에 넣어뒀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싶었어. 혹시나 하고 화장대 서랍을 열었는데, 우주인 인형이 달린 열쇠는 보이지 않더라. 요즘 들고 다니던 에코백과 라탄 백 안을 살펴봐도 헛수고였어. 이 더위에 걸어서 가라고 하면 네 동생이 짜증 낼 게 뻔했어. 게다가 그 이유가 차키를 못 찾아서라고 하면 한심해하는 눈빛과 울부짖는 잔소리 콤보를 참아내야겠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봤어. 가장 최근에 어디로 운전했는지, 집에 들어오면 습관적으로 가는 동선을 따라가 봤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대 서랍을 연다. 열쇠를 놓는다’, 고 생각하며 서랍을 열었는데 우주인이 깃발을 들고 인사를 하는 거야. 아까는 분명히 없었는데, 지금은 나타나다니! 무슨 마술도 아니고 헛웃음이 났어. 아까 내 눈을 가렸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의심이었어. 솔직히 처음 서랍을 열 때 이렇게 생각했었거든


‘가방에 뒀던 것 같은데, 서랍엔 아마 없을 거야.’


나의 불신에 있던 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지.


네가 재수할 때 시작은 믿음이었겠지. ‘다시 공부하면 꼭 잘 볼 수 있어. 지금 내 성적은 진짜가 아니야. 아직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 내가 이것밖에 안 되다니, 그럴 리 없어. 난 반드시 진짜 내 실력을 보여 줄 거야. 00대 00과 야 기다려!’라는 확신.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믿음은 진실을 보게 해 주고, 진실로 이루게 해 준단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을 이룬 사람다운 태도와 자세를 갖추는 것이지. 말하자면, 00 대학교 학생답게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00 학 전공을 이수한 학생답게 지금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 확고한 신념으로 지금을 보낸다면, 그 대학의 열쇠는 이미 우리 손에 있는 것이지.


유월에 청계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할머니가 산딸기와 오디를 종이컵에 수북이 담아 팔고 계셨어. 늦은 오후여서 할머니는 남은 것을 얼른 팔고 싶은 눈치였어. 두꺼운 도화지에 ‘한 컵 이천 원’이라고 쓴 비뚠 글씨를 보며 지나가는데, 할머니가 나를 불렀어.


“내가 직접 딴긴데, 아주 맛나. 세 개 오천 원에 가져가. 한번 잡솨봐.”


자부심이 느껴지는 우렁찬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춰졌어. 그리고 붉은 알갱이를 입에 넣었지. 그런데 기대와 달리 맛이 없었어.


“맛이 없는데요?”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맛없는 걸 골른겨. 두 개 더 먹어봐.”


오답을 말해 혼나는 기분이었어. 할머니의 당찬 목소리에 더 짙은 열매를 고르며 엄마도 이건 맛있길 바라게 됐지.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맛이 없었어.


“이것도 맛이 없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했어.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농작물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셨어. 내가 파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그녀의 말투에 ‘난 하필 맛없는 것만 골라 먹은 거야. 내가 먹은 세 알 말고 나머진 다 달콤할 거야.’라고 믿게 됐지.


엄마가 고민하는 사이에 할머니는 이미 검은 봉지를 손으로 비벼 둥그렇게 부풀리고 계셨어. 홀린 듯 산딸기와 오디를 세 컵, 총 여섯 컵을 사서 집으로 갔지. 소쿠리에 담아보니 꽤 많은 양이었어. 귀한 열매 한 줌을 입에 넣었어. 입안 가득 과육이 터지며 상큼했지만 역시 달진 않더라. 할머니의 믿음이 엄마의 미각을 이긴 것이었지. 아마 그날 할머니는 좌판을 빨리 정리하고 귀가하셨을 거야. 역시 내 새끼들은 맛있다고 생각하시며.


마하트마 간디는 믿음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어.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엄마는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할머니는 자신의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셨고, 그 모습이 엄마를 움직이게 한 것이지. 혹시 불안과 의심이 네 마음을 어지럽힌다면 분명히 믿길 바란다. 네가 간절히 바라는 모두를.


2025년 7월 31일 목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엄마도 훌륭한 아들의 엄마답게 품격을 갖추고 있을게.


<답장>


문제를 풀다가 속이 울렁거리고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눈이 뻑뻑해서 슬슬 한계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주, 남은 이틀 글 덕분에 안 죽고 버틸 순 있겠다 ㅎㅎ( 진짜 죽을 것 같단 건 아님) 훌륭한 아들의 훌륭한 엄마의 아들답게 나를 믿고 공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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